카테고리 없음
[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며](12) 공화국의 관점에서 본 분단과 통일 下
Dannie9
2010. 7. 16. 10:13
[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며](12) 공화국의 관점에서 본 분단과 통일 下
김상봉 전남대 교수·철학
ㆍ통일은 ‘사이비 전체’ 버리고 ‘참된 전체’ 여는 것
박명림 선생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이번 주제는 순서를 바꾸어 선생님께서 먼저 글을 주셨는데, 주신 글을 보고 나니
제가 먼저 쓰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 “통일지상주의는 결국 분단 강화에 기여한다”고 말씀하신 것에 저도 동의합니다. “통일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평화”라는 말씀 역시 제가 몸담고 있는 진보신당이 일관되게 취하고 있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선생님께서 염려하신 통일지상주의보다는 통일에 대한 무관심이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통일 없이 과연 평화라는 것이 실현 가능한가에 대해서도 회의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는 분단의 뜻과 통일의 당위성에 대해 몇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남한에서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왜 반드시 통일을 해야 하느냐고 반문합니다. 더러는 그것이 건전한 비판정신의 표현이고, 민족주의나 국가주의에 구애받지 않는 진보적인 정신의 표현이라 간주되기도 하지요. 하지만 단지 논리가 문제라면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일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습니까? 당연히 남북한이 자유왕래하고 평화공존하면 그만이지 굳이 통일까지 해야 하느냐고 되물을 수 있고, 그에 대해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대답이 없으니, 아무런 필연성도 없는 통일을 고집하는 사람이 맹목적인 바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거꾸로 물으면 어떻습니까? 자유왕래하고 평화공존할 수 있다면, 왜 다시 한 나라가 되면 안 되는가? 통일이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일이 아니듯 분단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일할 수 있는데 하지 말고 분단상태를 유지하자는 주장도 아무런 필연성이 없기는 마찬가지인 것이지요. 그럼에도 분단을 유지하려 한다면 그 경우에 제시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들 하고 같이 살 수는 없어!’ 멀쩡하게 한 나라로 살던 사람들이 마치 남남인 것처럼 갈라져 살 수 있으려면 오직 상대에 대한 감추어진 증오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런 까닭에 분단도 통일도 그 자체로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지만, 적어도 분단과 평화를 동시에 추구하겠다는 것은 물과 불을 동시에 손에 쥐겠다는 것처럼 비현실적인 소망이며, 오직 남과 북이 통일을 향한 공동의 적극적인 노력을 포기하지 않아야만 지금의 평화도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지금처럼 남북이 서로 맹목적인 적개심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남한이 미국과 합작하여 북한의 목줄을 죈다면, 그래서 북한이 정말로 참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몰린다면 북한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철학책이나 파먹고 사는 저 같은 바보라도 뻔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인데, 북한의 입장에서는 바로 코앞에 보이는 영종도 인천공항의 활주로나 서울로 들어오는 고속도로 또는 영종대교를 향해 창고에서 썩고 있는 미사일 몇 발만 쏘면 모든 문제가 간단히 해결될 것입니다. 굳이 전쟁까지 가지 않더라도 북한은 남한을 세계로부터 고립시키고 남한 경제를 언제라도 마비상태에 빠뜨릴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현실정치적 논의는 전문가이신 선생님께 맡기고 철학하는 저는 분단과 통일의 뜻이 과연 무엇인지를 좀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저는 여기서 ‘뜻’이라는 말 자체를 함석헌이 말한 의미로 썼습니다만, 분단과 통일의 뜻에 대해서도 제 입으로 서툰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우리의 스승인 함석헌의 말을 전하는 것이 더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이제껏 함석헌처럼 참되고 심오하게 분단과 통일의 문제를 생각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함석헌에 따르면 분단은 우연한 비극도 아니고 단순히 국제정치적 세력관계에서만 이해할 일도 아니며, 보다 더 깊은 세계사적 의미의 표출입니다. 인간의 자유는 오직 전체와 하나됨에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 한갓 개체인 인간은 전체의 종일 뿐입니다. 오직 전체와 하나 되어 전체의 주인이 될 때 비로소 나는 내 삶의 주인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태곳적부터 보다 더 큰 전체를 향해 끊임없이 발돋움해왔습니다. 이를 가리켜 함석헌은 ‘전체가 자라는 것’이라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자라는 전체의 첫 단계는 가족입니다. 물론 가족 역시 자라는 것이어서 가족이 씨족이 되고 씨족이 부족이 되는 것이겠지요. 아무튼 인간은 자기를 가족과 일치시킴으로써 전체와 하나 되고 이를 통해 자유를 얻으려 합니다. 이렇게 나와 가족의 일치에 대한 욕구가 윤리적 원리로 나타난 것이 효(孝)라고 함석헌은 보았습니다. 하지만 가족이 최종적 전체일 수는 없으니, 다음에 등장한 전체가 국가입니다. 대개 고대문명의 발상은 다른 무엇보다 문자의 발명과 함께 국가의 출현으로 표시되는데, 그 이후 인류는 서쪽으로는 그리스와 로마에서 시작하여 동으로는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은 물론이고 더 앞으로 가서 아즈텍이나 잉카제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국가형태를 실험해 왔습니다. 그리고 개인은 국가와 하나 되는 삶 속에서 자기실현을 추구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개인과 국가의 일치에 대한 욕구가 윤리적 원리로 표현된 것이 충(忠)입니다.
함석헌에 따르면 우리 시대는 더 이상 국가가 최종적 전체일 수 없게 된 시대입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이제 개인은 국가의 경계를 넘어 타자와 만나고 자기를 실현하려 합니다. 그렇게 국가의 경계를 넘어 확장된 만남의 지평이 세계이니 지금은 세계라는 더 큰 전체가 국가라는 낡은 전체를 지양하는 시대입니다. 국가가 출현한 뒤에도 인간은 여전히 가족을 이루고 살지만 누구도 가족에 매여 살지는 않는 것처럼, 앞으로도 국가는 남아 있겠지만 누구도 국가에 매여 살지는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가족이든 국가든 보다 더 큰 전체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전체는 자동적으로 열리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전체의 테두리를 정해주고 그것을 하나의 통일체로 유지해주는 형성원리를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의 근본문제는 인간이 세계라는 보다 더 큰 전체로 발돋움하기 시작했으나 그 세계의 참된 형성원리가 아직 온전히 정립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하여 인류는 나름으로 전체의 형성원리가 될 만한 것을 열심히 찾게 되는데, 우리 시대에 등장한 대표적인 전체의 원리가 바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입니다. 자본주의는 돈에 의한 세계화를 추구하고, 공산주의는 이념에 의한 세계화를 추구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둘은 사이비 전체원리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돈도 추상적 이념도 인간을 참된 의미에서 만나게 해주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 둘 다 서로 대립할 뿐 참된 전체를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전체의 이름으로 인류를 분열시키게 됩니다.
모든 현대국가에는 보이지 않는 분단선이 있습니다. 같은 국가에 살면서도 어떤 전체를 꿈꾸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것이니, 보이지 않는 분단이라는 것이지요. 공화국의 전통이 확고한 나라에서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부딪쳐도 그것이 치명적인 분열로 이어지지 않고 생산적인 정치적 긴장으로 남지만, 한국처럼 공화국의 전통은 없고 가족주의가 지배하는 나라에서는 마치 땅속에 끓는 용암이 땅거죽이 얇을 곳을 만나면 가차없이 치솟아 지표를 찢어 놓듯이, 두 세계관이 나라 자체를 아예 현실적으로 분단시켜 버립니다.
그 뒤 남한의 자본주의와 북한의 공산주의는 참된 통일과 전체의 원리가 아니라 배제와 분열의 원리로 작동해왔습니다. 한국전쟁은 단지 그런 본질의 현상적 표출이었을 뿐입니다. 두 체제 모두 자기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철저히 배척했으니, 남한에서는 공산주의가 그리고 북한에서는 기독교가 멸균처리되었다 할 정도로 박해받았습니다. 이것 자체가 두 체제 모두 사이비 전체의 현실태라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배제하고 분열시키면서 참된 전체를 이룰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구도 전체를 지향하지 않으면서 자유로운 주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하여 남과 북의 체제는 너나없이 주체성의 결핍으로 병들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남한은 시민의 주체성을 추구해왔고 북한은 국가 자체의 주체성을 추구해왔습니다. 표면적으로 보자면 두 체제는 각자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처럼 보입니다. 남한 사회의 시민적 주체성처럼 북한이 보여주는 국가적 주체성 역시 놀라운 데가 있습니다. 하지만 국가의 주체성과 시민의 주체성은 혼자서는 결코 온전히 유지될 수 없습니다. 시민이 국가를 주체적으로 형성하는 한에서 시민도 국가도 자유롭고 주체적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아무리 국가가 강고한 것처럼 보여도 위태롭고 시민이 아무리 자유로워 보여도 그 자유는 국가와 자본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만 가능한 사이비 자유일 뿐입니다. 돈이 허락하는 자유가 참된 자유일 수 없듯이, 시민의 참된 자발성에 뿌리박지 못한 국가의 주체성 역시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참으로 자유와 주체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기 속에 전체를 품어야 하고, 전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통일해야 합니다. 통일하기 위해서는 타자를 자기 속에 받아들이는 서로주체성의 실현밖에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북한에 종교의 자유가 없는 것을 끔찍한 일이라 생각하지만, 남한에 공산주의가 발붙일 수 없는 것 역시 똑같이 끔찍한 억압입니다. 통일을 위해서는 전체를 지향하는 모든 주의주장이 억압이나 차별 없이 공공적인 토론의 장에서 주장되고 또 비판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현존하는 이념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낡은 것을 모두 버리고 새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입니다. 통일은 낡은 사이비 전체에 대한 아집을 버리고 참된 전체를 여는 것으로, 남한식 자본주의와 북한식 공산주의를 모두 지양할 때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통일이란 옛날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한반도의 분단이 세계의 분열로부터 왔으니 한반도의 통일은 세계의 통일과 더불어 갈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함석헌은 이런 의미에서 한반도의 통일을 새로운 세계, 참된 전체를 개방하라고 역사가 우리에게 부과한 사명이라 보았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구함으로써 세계를 구하는 일인 것입니다. 절망적 주변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런 시대에 이 땅에 사는 것은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지요. 평안을 빌며 이만 줄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통일보다 중요한 것은 평화’라는 진보진영의 의제 속에는 통일지상주의에 대한 견제가 담겨 있지만 자칫 통일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무관심을 방기할 수도 있다. 사진은 2008년 금강산에서 열린 6·15기념 민족통일대회에서 한반도기를 흔들며 환호하는 참가자들.

007년 경의선 남북열차 시험운행을 앞두고 ‘반갑습니다’라는 인사말이 쓰인 깃발이 휘날리는 임진강역사의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박명림 선생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이번 주제는 순서를 바꾸어 선생님께서 먼저 글을 주셨는데, 주신 글을 보고 나니
제가 먼저 쓰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 “통일지상주의는 결국 분단 강화에 기여한다”고 말씀하신 것에 저도 동의합니다. “통일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평화”라는 말씀 역시 제가 몸담고 있는 진보신당이 일관되게 취하고 있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선생님께서 염려하신 통일지상주의보다는 통일에 대한 무관심이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통일 없이 과연 평화라는 것이 실현 가능한가에 대해서도 회의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는 분단의 뜻과 통일의 당위성에 대해 몇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남한에서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왜 반드시 통일을 해야 하느냐고 반문합니다. 더러는 그것이 건전한 비판정신의 표현이고, 민족주의나 국가주의에 구애받지 않는 진보적인 정신의 표현이라 간주되기도 하지요. 하지만 단지 논리가 문제라면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일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습니까? 당연히 남북한이 자유왕래하고 평화공존하면 그만이지 굳이 통일까지 해야 하느냐고 되물을 수 있고, 그에 대해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대답이 없으니, 아무런 필연성도 없는 통일을 고집하는 사람이 맹목적인 바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거꾸로 물으면 어떻습니까? 자유왕래하고 평화공존할 수 있다면, 왜 다시 한 나라가 되면 안 되는가? 통일이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일이 아니듯 분단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일할 수 있는데 하지 말고 분단상태를 유지하자는 주장도 아무런 필연성이 없기는 마찬가지인 것이지요. 그럼에도 분단을 유지하려 한다면 그 경우에 제시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들 하고 같이 살 수는 없어!’ 멀쩡하게 한 나라로 살던 사람들이 마치 남남인 것처럼 갈라져 살 수 있으려면 오직 상대에 대한 감추어진 증오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런 까닭에 분단도 통일도 그 자체로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지만, 적어도 분단과 평화를 동시에 추구하겠다는 것은 물과 불을 동시에 손에 쥐겠다는 것처럼 비현실적인 소망이며, 오직 남과 북이 통일을 향한 공동의 적극적인 노력을 포기하지 않아야만 지금의 평화도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지금처럼 남북이 서로 맹목적인 적개심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남한이 미국과 합작하여 북한의 목줄을 죈다면, 그래서 북한이 정말로 참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몰린다면 북한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철학책이나 파먹고 사는 저 같은 바보라도 뻔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인데, 북한의 입장에서는 바로 코앞에 보이는 영종도 인천공항의 활주로나 서울로 들어오는 고속도로 또는 영종대교를 향해 창고에서 썩고 있는 미사일 몇 발만 쏘면 모든 문제가 간단히 해결될 것입니다. 굳이 전쟁까지 가지 않더라도 북한은 남한을 세계로부터 고립시키고 남한 경제를 언제라도 마비상태에 빠뜨릴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현실정치적 논의는 전문가이신 선생님께 맡기고 철학하는 저는 분단과 통일의 뜻이 과연 무엇인지를 좀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저는 여기서 ‘뜻’이라는 말 자체를 함석헌이 말한 의미로 썼습니다만, 분단과 통일의 뜻에 대해서도 제 입으로 서툰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우리의 스승인 함석헌의 말을 전하는 것이 더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이제껏 함석헌처럼 참되고 심오하게 분단과 통일의 문제를 생각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함석헌에 따르면 분단은 우연한 비극도 아니고 단순히 국제정치적 세력관계에서만 이해할 일도 아니며, 보다 더 깊은 세계사적 의미의 표출입니다. 인간의 자유는 오직 전체와 하나됨에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 한갓 개체인 인간은 전체의 종일 뿐입니다. 오직 전체와 하나 되어 전체의 주인이 될 때 비로소 나는 내 삶의 주인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태곳적부터 보다 더 큰 전체를 향해 끊임없이 발돋움해왔습니다. 이를 가리켜 함석헌은 ‘전체가 자라는 것’이라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자라는 전체의 첫 단계는 가족입니다. 물론 가족 역시 자라는 것이어서 가족이 씨족이 되고 씨족이 부족이 되는 것이겠지요. 아무튼 인간은 자기를 가족과 일치시킴으로써 전체와 하나 되고 이를 통해 자유를 얻으려 합니다. 이렇게 나와 가족의 일치에 대한 욕구가 윤리적 원리로 나타난 것이 효(孝)라고 함석헌은 보았습니다. 하지만 가족이 최종적 전체일 수는 없으니, 다음에 등장한 전체가 국가입니다. 대개 고대문명의 발상은 다른 무엇보다 문자의 발명과 함께 국가의 출현으로 표시되는데, 그 이후 인류는 서쪽으로는 그리스와 로마에서 시작하여 동으로는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은 물론이고 더 앞으로 가서 아즈텍이나 잉카제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국가형태를 실험해 왔습니다. 그리고 개인은 국가와 하나 되는 삶 속에서 자기실현을 추구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개인과 국가의 일치에 대한 욕구가 윤리적 원리로 표현된 것이 충(忠)입니다.
함석헌에 따르면 우리 시대는 더 이상 국가가 최종적 전체일 수 없게 된 시대입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이제 개인은 국가의 경계를 넘어 타자와 만나고 자기를 실현하려 합니다. 그렇게 국가의 경계를 넘어 확장된 만남의 지평이 세계이니 지금은 세계라는 더 큰 전체가 국가라는 낡은 전체를 지양하는 시대입니다. 국가가 출현한 뒤에도 인간은 여전히 가족을 이루고 살지만 누구도 가족에 매여 살지는 않는 것처럼, 앞으로도 국가는 남아 있겠지만 누구도 국가에 매여 살지는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가족이든 국가든 보다 더 큰 전체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전체는 자동적으로 열리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전체의 테두리를 정해주고 그것을 하나의 통일체로 유지해주는 형성원리를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의 근본문제는 인간이 세계라는 보다 더 큰 전체로 발돋움하기 시작했으나 그 세계의 참된 형성원리가 아직 온전히 정립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하여 인류는 나름으로 전체의 형성원리가 될 만한 것을 열심히 찾게 되는데, 우리 시대에 등장한 대표적인 전체의 원리가 바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입니다. 자본주의는 돈에 의한 세계화를 추구하고, 공산주의는 이념에 의한 세계화를 추구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둘은 사이비 전체원리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돈도 추상적 이념도 인간을 참된 의미에서 만나게 해주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 둘 다 서로 대립할 뿐 참된 전체를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전체의 이름으로 인류를 분열시키게 됩니다.
모든 현대국가에는 보이지 않는 분단선이 있습니다. 같은 국가에 살면서도 어떤 전체를 꿈꾸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것이니, 보이지 않는 분단이라는 것이지요. 공화국의 전통이 확고한 나라에서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부딪쳐도 그것이 치명적인 분열로 이어지지 않고 생산적인 정치적 긴장으로 남지만, 한국처럼 공화국의 전통은 없고 가족주의가 지배하는 나라에서는 마치 땅속에 끓는 용암이 땅거죽이 얇을 곳을 만나면 가차없이 치솟아 지표를 찢어 놓듯이, 두 세계관이 나라 자체를 아예 현실적으로 분단시켜 버립니다.
그 뒤 남한의 자본주의와 북한의 공산주의는 참된 통일과 전체의 원리가 아니라 배제와 분열의 원리로 작동해왔습니다. 한국전쟁은 단지 그런 본질의 현상적 표출이었을 뿐입니다. 두 체제 모두 자기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철저히 배척했으니, 남한에서는 공산주의가 그리고 북한에서는 기독교가 멸균처리되었다 할 정도로 박해받았습니다. 이것 자체가 두 체제 모두 사이비 전체의 현실태라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배제하고 분열시키면서 참된 전체를 이룰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구도 전체를 지향하지 않으면서 자유로운 주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하여 남과 북의 체제는 너나없이 주체성의 결핍으로 병들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남한은 시민의 주체성을 추구해왔고 북한은 국가 자체의 주체성을 추구해왔습니다. 표면적으로 보자면 두 체제는 각자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처럼 보입니다. 남한 사회의 시민적 주체성처럼 북한이 보여주는 국가적 주체성 역시 놀라운 데가 있습니다. 하지만 국가의 주체성과 시민의 주체성은 혼자서는 결코 온전히 유지될 수 없습니다. 시민이 국가를 주체적으로 형성하는 한에서 시민도 국가도 자유롭고 주체적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아무리 국가가 강고한 것처럼 보여도 위태롭고 시민이 아무리 자유로워 보여도 그 자유는 국가와 자본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만 가능한 사이비 자유일 뿐입니다. 돈이 허락하는 자유가 참된 자유일 수 없듯이, 시민의 참된 자발성에 뿌리박지 못한 국가의 주체성 역시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참으로 자유와 주체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기 속에 전체를 품어야 하고, 전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통일해야 합니다. 통일하기 위해서는 타자를 자기 속에 받아들이는 서로주체성의 실현밖에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북한에 종교의 자유가 없는 것을 끔찍한 일이라 생각하지만, 남한에 공산주의가 발붙일 수 없는 것 역시 똑같이 끔찍한 억압입니다. 통일을 위해서는 전체를 지향하는 모든 주의주장이 억압이나 차별 없이 공공적인 토론의 장에서 주장되고 또 비판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현존하는 이념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낡은 것을 모두 버리고 새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입니다. 통일은 낡은 사이비 전체에 대한 아집을 버리고 참된 전체를 여는 것으로, 남한식 자본주의와 북한식 공산주의를 모두 지양할 때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통일이란 옛날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한반도의 분단이 세계의 분열로부터 왔으니 한반도의 통일은 세계의 통일과 더불어 갈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함석헌은 이런 의미에서 한반도의 통일을 새로운 세계, 참된 전체를 개방하라고 역사가 우리에게 부과한 사명이라 보았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구함으로써 세계를 구하는 일인 것입니다. 절망적 주변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런 시대에 이 땅에 사는 것은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지요. 평안을 빌며 이만 줄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