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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의 사상가’가 남긴 기독교 문명 비판

by Dannie9 2010. 2. 27.
반역의 사상가’가 남긴 기독교 문명 비판
서구 기독교의 변질과 타락을 지적한
‘이반 일리히’의 마지막 육성 대담 기록
‘존재의 상보성’을 바탕으로 ‘공생’ 주창
한겨레 전진식 기자
» 이반 일리히는 현대 서구 세계가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서 다른 세계를 조종하려는 것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타락이라고 규정했다.




〈이반 일리히의 유언〉
데이비드 케일리 엮음, 이한·서범석 옮김/이파르·1만5000원

이반 일리히(1926~2002)는 도저와 철저의 사상가다. 바닥에 이르는 걸 도저(到底)라 하고, 바닥을 꿰뚫는 걸 철저(徹底)라 한다. 바닥이란 현대사회 문명의 뿌리를 가리키는바, 일리히가 보기에 그것은 근대성과 기독교였다. 이 둘을 일리히는 <학교 없는 사회>(1971)를 낸 이래 줄곧 파고들었다. 2002년 그가 숨졌을 때 프랑스 <르몽드>가 “전 생애를 바친 수미일관 반역의 사상가”라고 평한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모멸과 차별의 어린 시절을 거쳐 가톨릭 사제로서 몬시뇰까지 이르렀지만, 그는 결국 모든 직위를 내던지고 ‘사회와 불화하는 길’을 걷는다. <이반 일리히의 유언>은 책 제목처럼 그의 마지막 육성을 담은 책이다. 또한 그가 평생을 추구했던 ‘근본적 가치’(참다운 인간애)가 무엇인지를 넉넉한 회고의 목소리로 들려준다. 1997년과 99년 두 차례에 걸쳐 캐나다의 라디오 프로듀서인 데이비드 케일리와 나눈 긴 대담의 형식으로 짜인 이 책은 ‘일리히를 만날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그의 저서들이 난해하기로 유명했던 탓이다.

일리히는 이 책에서 하나의 근원적 명제를 던진다. “최선이 타락하면 최악이 된다.” 최선이란 초기 기독교가 담고 있던 정신이며, 최악이란 현대사회의 총체적 현실인바 그리스도 신앙에 대한 배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화두로 잡았다. 어느 날 예수에게 율법학자가 묻는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 예수는 강도들에게 폭행당해 길가에 버려진 한 남자의 이야기로 답한다. 두 명의 성직자가 모두 그를 지나치지만 ‘이방인’인 사마리아인 한 사람이 다친 남자를 도와준다.


» 〈이반 일리히의 유언〉
일리히가 보기에, 여기서 정녕 새로운 것은 ‘(어떤 제도·관습·신념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다. 그러나 현대인은 이를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말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 이 일화가 사람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로만 언급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나’를 가장 심원하고 온전한 의미에서 이해하게 해줍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이 허용되고, 그럼으로써 너에게 나와 공통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을 주어, 비대칭적으로 너와 균형을 맞출 수 있게 해준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상보성을 통해 존재한다고 일리히는 말한다. 차안은 피안을 생기게 하고 피안은 차안을 생기게 한다는 것이다. 신이 아담을 창조한 뒤 왜 이브라는 ‘인간’을 또 창조했느냐는 물음에 일리히는 이렇게 답한다. “신이 아담에게 뭔가 잡을 수 있는 것을 줘야 했기 때문입니다. 신은 이브를 창조하여 아담에게 줌으로써 아담으로 하여금 창조와 신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에 대한 감각을 갖도록 하였다는 겁니다.” 일리히는 창조의 선후 관계를 넘어 상보성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왜냐하면 서로가 서로의 존재 균형을 구성하는 두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이웃을 맞아들이는 환대와 관용이 사라진 현대사회를 비판하는 중요한 사례이며, 그 바탕에는 인간 존재의 상보성을 망각한 현대인의 ‘죄’가 있다는 설명이다.

이처럼 현대사회가 ‘타락’한 이유로 일리히가 지목하는 것이 ‘제도’다. 교회가 생산·소비의 실물경제에 녹아든 지 오래이며, 대형화·관료화함으로써 복음조차 제도화해버렸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랑은 한낱 ‘서비스에 대한 요구’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는 게 일리히의 진단이다. 이미 60년대에 일리히는 남아메리카에서 벌어진 ‘미국식 선교화’를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그는 당시를 회고하며 ‘최선이 타락한 것’의 모델이라고까지 말한다. 거기엔 무비판적인 신앙이라는 기독교인의 치부가 있다는 지적이다. “니체는 말했지요. 세상을 둘러보면 전지전능한 신을 믿을 수 없다고. 니체는 이러한 태도를 이성의 자부심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전지전능한 신을 니체처럼 아름다운 언어로 격렬하게 다룬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일리히는 현대사회를 ‘감사할 줄 모르는 세상’이라 했다. 사랑과 호의를 피드백 따위로 설명하는 시대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지점에서 일리히는 희망을 꺼낸다. 책의 원제인 ‘미래의 북녘으로 흐르는 강’(The rivers north of the future)이다. 파울 첼란의 시에서 따온 이 구절은 참다운 신앙인이 품은 희망의 근거를 드러낸다. “미래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건 사람을 잡아먹는 우상입니다. 오로지 희망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끝내 이 도저와 철저의 사상가는 ‘희망의 제도화’조차 거부한다. 일리히에게 신·사랑·자유·선·균형 등은 모두 같은자리말이기 때문이다. “저는 어느 누구도 제가 말한 것을 답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기사등록 : 2010-02-26 오후 08:5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