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창칼럼]‘공론의 공간’의 쇠퇴
[김우창 칼럼]‘통합의 정치’ 오바마 취임사 김우창 | 고려대 명예교수
[김우창칼럼]스스로를 위한 학문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신문 보도에 의하면, 얼마 전에 녹화한 KBS 방송 프로그램에는 여야 원내 대표가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 부르는 장면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여야 대표가 상대를 평가하는 부분에서도 서로를 ‘합리적이고 순수’하다, 또는 ‘소신있는 의회주의자’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폭력 사태에까지 이르렀던 연말 국회의 인상과는 달리 여야의 대결이 함께 설 공간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극한적인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같이 노래할 수는 있어도 의안을 두고 논의는 함께할 수 없는 것이다. 문제의 해결은 토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아(我)와 비아(非我)의 혈투로서만 이루어진다 - 정당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우리의 공적 논의의 풍습은 이렇게 굳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편가르기’ 만연한 국회와 학계
국회의 기능은 의안을 내고, 그것을 토의하고, 의결하는 것이다. 형식상으로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은 토의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국회는 함께 이야기하는 공간이다. 문제가 되는 의제들은 합의보다 대립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기 쉽다. 그러면서도 이야기가 오고 갈 수 있다는 것이 국회의 본래 의미일 것이다. 그 바탕에는 토의를 통하여 서로의 다름이 조정될 수 있다는 전제가 있다. 토의는 어떤 안건을 두고, 또 문제가 되는 상황에 대하여,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다른 사람을 설득하여 그것에 동의할 수 있게 하고, 나아가서는 자신과는 다른 의견을 경청하고 그 입장에 대한 설명을 듣고 새로운 사실과 설명에 접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수정하고, 급기야는 자신이 반대했던 의견과 입장으로 돌아서고 새로운 결정을 내리는 과정을 말한다.
물론 이것은 이상일 뿐이고 국회의 의안이나 법안 심의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의결이다. 의안이 어떻게 처리될 것인가는 정당의 입장과 견해에 의하여 이미 결정되어 있고, 의사(議事)는 표결을 통하여 그것을 확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표결은 개인적 숙고와는 관계가 없는 집단 행위이다. 국회가 참으로 토의의 장소가 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고 그것은 기껏해야 협상과 타협의 장소가 될 뿐이다. 물론 어떤 문제는 첨예한 대립이 있을 뿐 타협의 여유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도 현실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생각의 장에서는 여러 가능한 방안이 있다고 생각되어도 행동의 장에서의 행동 논리는 다른 모든 선택을 배제하는 하나의 선택만을 허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의 장을 열어 놓고 토의의 절차를 유지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공론의 공간을 유지하는 행위의 일부이다. 이 공간의 유지는 현재나 미래의 행동적 결정을 합리적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는 데에 핵심적 요인이 될 뿐만 아니라 적대적 입장 아래에도 잠겨 있는 공공의 운명을 확인하는 일이 된다.
지난번 여야 대결에서 크게 문제가 된 것은 주로 언론 관련법이나 금산분리와 관계된 법이다. 후자는 금융과 산업체의 분리를 완화하자는 것인데, 새로운 신문법이나 방송법도 현행의 엄격한 규정들을 완화하자는 것이다. 그러니까 둘 다 규제를 완화하고 자유의 영역을 넓히자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하고 기업 활동의 자유를 확대하려는 현 정부의 취지에 맞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시장의 자유에만 관계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대체적으로 민주주의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이것은 민주주의를 극히 추상적으로, 또는 원리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원리주의적 확신이 대체로 그렇게 되듯이, 이것은 옹호하려고 하는 현실 그것을 왜곡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민주주의 체제하에서도 자유는 일정한 체제로서 정립된 자유를 말한다. 그것은 사회의 다른 여러 필요와 균형 속에서 향유될 수 있는 자유이다. 언론을 통하여 다수자의 의견과 자유를 수렴(收斂)하고자 할 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떤 일부 세력에 의하여 독점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령 국회에서 의원의 발언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20분으로 제한한다든지 하여 여러 복잡한 규칙 속에서 행해지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 언론의 자유가 의미 있는 것이 되려면, 공정성과 다양성 그리고 실천적 효율성 등의 조건을 보장하는 제도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들의 확보가 국회 안팎에서 같은 것이 될 수는 없지만, 뉴스매체의 독점이나 비대화를 방지하는 것은 언론 자유를 위하여 받아들여야 하는 불가피한 조처이다.
토의 과정 생략땐 ‘공공성’ 잃어
금산 분리의 문제는 전문가들이 시비를 헤아려야 하는 문제라고 하겠지만 (물론 언론 관련법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오늘의 세계적 금융, 경제 위기는 바로 금융과 산업이 지나치게 얽혀들었던 결과라는 인상이 짙다. 독일에서 최근에 일어난 센세이셔널한 사건의 하나는 대기업인이며 재벌인 아돌프 메르클레의 자살이다. 그는 약품회사, 시멘트 공장 등 제조업계의 거물이면서 은밀히 막대한 돈을 금융 투기에 투입하고 있었다. 그의 자살은 금융 투기의 손실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그의 기업들이 크게 타격을 입게 된 것은 물론이다. 메르클레의 죽음에 대한 한 논평은, ‘기업가는 신용대출의 말을 타야 큰 돈을 번다’는 유혹에 넘어간 것이라는 것이다. 그의 투자는 주로 주식과 관계된 것이었지만, 산업자금과 금융자금의 지나치게 유연한 혼융의 결과가 그의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은 이번 금융위기의 핵심을 요약해 보여준다. 이것은 산업경제의 합리성에 관한 문제이지만, 다른 관점에서 말하건대, 기업도 공익의 테두리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미국의 시장 경제 체제에도 독점 통제와 공정 거래를 위한 강력한 규제가 존재한다. 기업의 존재도 사회 전체의 이익에 의하여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대전제이다. 정치적 관점에서, 사회 한 부분의 비대화는 비민주적 권력의 비대화가 되고 결국 자유와 평등을 손상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것들은 사실 원론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것을 되풀이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원하는 것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민주주의 사회를 세워나가는 것이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근본 목표 또는 적어도 사회공간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타협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 일이 될 것이다. 공론 공간의 건재가 이것을 매개한다.
최근 우리 사회의 두드러진 경향의 하나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행동적 대결만이 문제 해결의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모든 정치적인 발언은 물론 학문적인 발언들에서까지 발언자가 어느 편에 서있는가 하는 것이 판단의 제1차적 기준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국회에서 그런 것처럼 다른 여러 공론의 장에서도 원칙과 사실과 논리를 말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거나 이적행위(利敵行爲)로 간주된다. 폭력 대결이 아니라도, 쟁점이 없다고 하여, 법안을 한 번에 58건씩이나 통과시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토의가 국회에서 사라지는 데에는 불가피한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학계를 포함하여 다른 공론의 장에서도 사실적이고 합리적 분석보다는 편가르기가 주된 풍조가 되는 것은 심히 걱정스러운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열려있는 합리적 토의 과정의 생략은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는 공공성이라는 자산이 소진된다는 것을 말한다.
‘편가르기’ 만연한 국회와 학계
국회의 기능은 의안을 내고, 그것을 토의하고, 의결하는 것이다. 형식상으로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은 토의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국회는 함께 이야기하는 공간이다. 문제가 되는 의제들은 합의보다 대립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기 쉽다. 그러면서도 이야기가 오고 갈 수 있다는 것이 국회의 본래 의미일 것이다. 그 바탕에는 토의를 통하여 서로의 다름이 조정될 수 있다는 전제가 있다. 토의는 어떤 안건을 두고, 또 문제가 되는 상황에 대하여,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다른 사람을 설득하여 그것에 동의할 수 있게 하고, 나아가서는 자신과는 다른 의견을 경청하고 그 입장에 대한 설명을 듣고 새로운 사실과 설명에 접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수정하고, 급기야는 자신이 반대했던 의견과 입장으로 돌아서고 새로운 결정을 내리는 과정을 말한다.
물론 이것은 이상일 뿐이고 국회의 의안이나 법안 심의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의결이다. 의안이 어떻게 처리될 것인가는 정당의 입장과 견해에 의하여 이미 결정되어 있고, 의사(議事)는 표결을 통하여 그것을 확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표결은 개인적 숙고와는 관계가 없는 집단 행위이다. 국회가 참으로 토의의 장소가 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고 그것은 기껏해야 협상과 타협의 장소가 될 뿐이다. 물론 어떤 문제는 첨예한 대립이 있을 뿐 타협의 여유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도 현실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생각의 장에서는 여러 가능한 방안이 있다고 생각되어도 행동의 장에서의 행동 논리는 다른 모든 선택을 배제하는 하나의 선택만을 허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의 장을 열어 놓고 토의의 절차를 유지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공론의 공간을 유지하는 행위의 일부이다. 이 공간의 유지는 현재나 미래의 행동적 결정을 합리적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는 데에 핵심적 요인이 될 뿐만 아니라 적대적 입장 아래에도 잠겨 있는 공공의 운명을 확인하는 일이 된다.
지난번 여야 대결에서 크게 문제가 된 것은 주로 언론 관련법이나 금산분리와 관계된 법이다. 후자는 금융과 산업체의 분리를 완화하자는 것인데, 새로운 신문법이나 방송법도 현행의 엄격한 규정들을 완화하자는 것이다. 그러니까 둘 다 규제를 완화하고 자유의 영역을 넓히자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하고 기업 활동의 자유를 확대하려는 현 정부의 취지에 맞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시장의 자유에만 관계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대체적으로 민주주의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이것은 민주주의를 극히 추상적으로, 또는 원리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원리주의적 확신이 대체로 그렇게 되듯이, 이것은 옹호하려고 하는 현실 그것을 왜곡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민주주의 체제하에서도 자유는 일정한 체제로서 정립된 자유를 말한다. 그것은 사회의 다른 여러 필요와 균형 속에서 향유될 수 있는 자유이다. 언론을 통하여 다수자의 의견과 자유를 수렴(收斂)하고자 할 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떤 일부 세력에 의하여 독점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령 국회에서 의원의 발언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20분으로 제한한다든지 하여 여러 복잡한 규칙 속에서 행해지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 언론의 자유가 의미 있는 것이 되려면, 공정성과 다양성 그리고 실천적 효율성 등의 조건을 보장하는 제도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들의 확보가 국회 안팎에서 같은 것이 될 수는 없지만, 뉴스매체의 독점이나 비대화를 방지하는 것은 언론 자유를 위하여 받아들여야 하는 불가피한 조처이다.
토의 과정 생략땐 ‘공공성’ 잃어
금산 분리의 문제는 전문가들이 시비를 헤아려야 하는 문제라고 하겠지만 (물론 언론 관련법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오늘의 세계적 금융, 경제 위기는 바로 금융과 산업이 지나치게 얽혀들었던 결과라는 인상이 짙다. 독일에서 최근에 일어난 센세이셔널한 사건의 하나는 대기업인이며 재벌인 아돌프 메르클레의 자살이다. 그는 약품회사, 시멘트 공장 등 제조업계의 거물이면서 은밀히 막대한 돈을 금융 투기에 투입하고 있었다. 그의 자살은 금융 투기의 손실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그의 기업들이 크게 타격을 입게 된 것은 물론이다. 메르클레의 죽음에 대한 한 논평은, ‘기업가는 신용대출의 말을 타야 큰 돈을 번다’는 유혹에 넘어간 것이라는 것이다. 그의 투자는 주로 주식과 관계된 것이었지만, 산업자금과 금융자금의 지나치게 유연한 혼융의 결과가 그의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은 이번 금융위기의 핵심을 요약해 보여준다. 이것은 산업경제의 합리성에 관한 문제이지만, 다른 관점에서 말하건대, 기업도 공익의 테두리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미국의 시장 경제 체제에도 독점 통제와 공정 거래를 위한 강력한 규제가 존재한다. 기업의 존재도 사회 전체의 이익에 의하여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대전제이다. 정치적 관점에서, 사회 한 부분의 비대화는 비민주적 권력의 비대화가 되고 결국 자유와 평등을 손상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것들은 사실 원론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것을 되풀이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원하는 것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민주주의 사회를 세워나가는 것이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근본 목표 또는 적어도 사회공간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타협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 일이 될 것이다. 공론 공간의 건재가 이것을 매개한다.
최근 우리 사회의 두드러진 경향의 하나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행동적 대결만이 문제 해결의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모든 정치적인 발언은 물론 학문적인 발언들에서까지 발언자가 어느 편에 서있는가 하는 것이 판단의 제1차적 기준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국회에서 그런 것처럼 다른 여러 공론의 장에서도 원칙과 사실과 논리를 말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거나 이적행위(利敵行爲)로 간주된다. 폭력 대결이 아니라도, 쟁점이 없다고 하여, 법안을 한 번에 58건씩이나 통과시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토의가 국회에서 사라지는 데에는 불가피한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학계를 포함하여 다른 공론의 장에서도 사실적이고 합리적 분석보다는 편가르기가 주된 풍조가 되는 것은 심히 걱정스러운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열려있는 합리적 토의 과정의 생략은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는 공공성이라는 자산이 소진된다는 것을 말한다.
입력 : 2009-01-14 18:38:25ㅣ수정 : 2009-01-14 18:38:2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취임식은 세계적인 뉴스거리가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축제의 계기가 되었다. 17세기 초 아프리카인들이 노예로서 미 대륙에 끌려온 이후, 19세기 말에는 노예 해방선언이 있었고, 20세기 중엽 이후 차별에 대한 끈질긴 저항 운동이 계속되었다. 오바마의 대통령 취임은 이 오랜 수난과 투쟁의 역사가 이제 하나의 평형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나타내는 사건이다. 또 케냐인 아버지를 둔 오바마의 대통령 취임은 한 나라의 정치가 인종만이 아니라 국적의 차별도 넘어설 수 있다는 - 세계사적인 전환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정치의 참된 의미는 ‘사회 통합’
축제 분위기와 함께 기대가 한껏 부푼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오바마 대통령 취임이 미국을 위하여 위대한 순간을 표한다고 하면서 다시 이것이 많은 새로운 기회를 여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말은 의례적인 것이고, 일반적인 기대감은 일시적 흥분의 결과일 수 있지만, 적어도 그의 취임사는 그 나름의 정치 비전 그리고 도덕적 확신을 전달해 준다. 물론 취임사는, 우리 주변의 수많은 경축 식사(式辭)에서 보는 바 빈 수사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또 한국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메시지가 한국의 상황에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 하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그 현실적 의미를 떠나서 적어도 취임사의 포괄적이고 도덕적 비전은 특히 우리 정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부럽게 생각되는 모형이 아닐 수 없다. 정치의 현장은 갈등과 투쟁의 현장이다. 목표는 거기에서의 승리다. 그렇다하더라도 정치의 참된 의미는 이 갈등과 투쟁, 그리고 승리를 넘어 더 넓은 사회 통합의 지평을 여는 데 있다. 사람과 사람의 궁극적인 화해 - 나라 안에서 그리고 나라를 넘어서의 화해야말로 도덕의 근본이다. 정치를 도덕적 행위로 승화시키는 것은 이 통합의 비전이고 그 실현을 향한 성력(誠力)이다.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사는 적어도 이러한 통할적인 비전을 느끼게 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라크로부터의 철수를 약속하고, 테러의 진원으로 간주하는 이슬람 세계에 대하여, “그들이 주먹을 편다면 손을 내밀어 그 손을 잡겠다”는 상호 화해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는 국가 안전은 힘만으로 확실한 것이 되지 아니하고 그것이 정의로운 것일 때 가능하다고 말한다. 정의란 모든 권력이 내세우는 명분이다. 이 점을 생각하여 그는, 정의로운 목표는 겸허함과 절제 속에서 조심스럽게 추구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종종 정의로운 이상은 정의롭지 않은 수단까지도 정당화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국가 안전을 위해서는 법치와 인권의 이상 등이 보류될 수 있다고 생각한 부시 정권의 실책을 비판적으로 본다. 그가 대통령 취임 첫날에 관타나모 수용소 폐지를 위한 절차를 지시한 것은 그의 이러한 생각을 실천에 옮기려 한 것이다. 국제 관계에 대한 그의 생각은 이러한 미국의 현실 문제들을 넘어 일반화된다. 그는 세계의 모든 나라에 우호 관계를 확장할 것을 희망하고 부유한 나라들이 세계 빈곤의 극복 그리고 지구 환경 문제의 해결에 힘써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당면한 가장 급박한 문제는 오늘의 경제 위기이다. 그의 금융 구제책과 공공사업의 계획은 이미 공표된 바 있다. 취임사에서 그는 다시 도로와 다리, 전기와 전자 통신망을 짓겠다는 것을 확인한다. 바다와 바람과 땅에서 추출될 수 있는 환경친화적인 에너지 개발을 촉진하겠다는 것도 이미 천명되었던 정책이다. 이러한 내용이 취임사에 언급된 것은 아니나, 오바마 내각에서 에너지 장관에 임명된 스티븐 추(Steven Chu)는 그동안 새로운 에너지 개발에 관계된 많은 아이디어를 내놓은, 노벨상을 받은 물리학자이다. 그의 제안에는 공해 없는 새로운 에너지원의 개발과 함께, 전국적인 전선망의 신축과 개축, 개인 주택, 공공건물의 광범위한 단열 계획 등이 포함되어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미 환경 기술의 개발과 현실화를 위하여 1500억달러의 배정을 결정했다. 그의 환경 에너지 계획은 미국과 세계의 미래에 지속적인 의미를 가질 것이다.
경제 회복을 위한 다른 전략도 단순한 원상복구를 말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의 경제 위기는 시장 경제의 위기이다.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 연설은 조용하면서도 근본적인, 시장 경제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문제는 시장이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부(富)의 창조와 자유 신장에서의 시장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켜보는 눈”을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감시의 눈은 경제와 아울러 정치의 눈을 말한다. 시장이 부자만을 위하여 기능할 때, 그것은 국민 전체의 번영을 가져오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국내총생산(GDP)이 얼마나 큰가보다 그것이 얼마나 모든 일하는 사람들에게 풍요를 제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시장의 의미는 그것이 ‘공동선’에 이르는 길이라는 데에 있다 -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공동선은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하고 자기 나름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데에서 실현된다. 경제의 기본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주거와 적절한 임금의 직장을 마련하고 “위엄을 가진 은퇴”를 가능하게 하며, 의료와, 복지와 교육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권리이며 미국의 사회적 의무라고 말하기 위하여 그는 보통 사람들의 노력의 결집으로 이루어진 나라가 미국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일보다는 여가를 앞세우고, “부와 귀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 미국의 가치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행동하고 노동하고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의 역할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노동 속에서 이름이 없는” 사람들, “스위트숍 (저임금, 열악한 환경의 공장)에서 일하고, 서부를 개척하고, 채찍을 견뎌내고 땅을 갈고” “손이 닳도록 일한 사람들”이다.
이러한 미국의 신화에 대한 언급은 물론 앞으로의 경제 정책이 이러한 사람들에게 고루 적정한 수준의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라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투쟁의 격화를 통해서 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가 말하는,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적정한 행복은 이미 미국의 건국 이념에 천명되어 있고 필요한 것은 그것을 다시 상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미국의 정치를 목죄고 있는 “작은 불만과, 거짓 약속과 비난과 낡은 독단론에 끝을 내고” 공동선을 향하여 다 함께 노력하는 일이다. 북돋워야 할 것은 “정직과 일과, 용기와 공정성, 관용과 호기심, 신의와 애국심” 그리고 책임감이다.
경제의 기본은 ‘공동선’의 실천
오바마 대통령의 사회통합의 비전은 너무나 안이한 생각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미국 밖의 눈으로 볼 때 더 중요한 문제점은 그의 웅변이 지나치게 미국 역사의 신화와 강대국으로서의 미국의 힘을 강조하는, 애국주의에 호소하는 것이어서 참으로 보편적인 도덕적 차원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들의 현실적 의미를 떠나서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사가 우리에게 상기해주는 것은 통합적 인간 화해의 비전이야말로 정치를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근본이라는 사실이다. 독단론과 그것에 의하여 촉발되는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의 정치에서 쉽게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이것이 아닌가 한다.
정치의 참된 의미는 ‘사회 통합’
축제 분위기와 함께 기대가 한껏 부푼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오바마 대통령 취임이 미국을 위하여 위대한 순간을 표한다고 하면서 다시 이것이 많은 새로운 기회를 여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말은 의례적인 것이고, 일반적인 기대감은 일시적 흥분의 결과일 수 있지만, 적어도 그의 취임사는 그 나름의 정치 비전 그리고 도덕적 확신을 전달해 준다. 물론 취임사는, 우리 주변의 수많은 경축 식사(式辭)에서 보는 바 빈 수사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또 한국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메시지가 한국의 상황에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 하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그 현실적 의미를 떠나서 적어도 취임사의 포괄적이고 도덕적 비전은 특히 우리 정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부럽게 생각되는 모형이 아닐 수 없다. 정치의 현장은 갈등과 투쟁의 현장이다. 목표는 거기에서의 승리다. 그렇다하더라도 정치의 참된 의미는 이 갈등과 투쟁, 그리고 승리를 넘어 더 넓은 사회 통합의 지평을 여는 데 있다. 사람과 사람의 궁극적인 화해 - 나라 안에서 그리고 나라를 넘어서의 화해야말로 도덕의 근본이다. 정치를 도덕적 행위로 승화시키는 것은 이 통합의 비전이고 그 실현을 향한 성력(誠力)이다.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사는 적어도 이러한 통할적인 비전을 느끼게 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라크로부터의 철수를 약속하고, 테러의 진원으로 간주하는 이슬람 세계에 대하여, “그들이 주먹을 편다면 손을 내밀어 그 손을 잡겠다”는 상호 화해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는 국가 안전은 힘만으로 확실한 것이 되지 아니하고 그것이 정의로운 것일 때 가능하다고 말한다. 정의란 모든 권력이 내세우는 명분이다. 이 점을 생각하여 그는, 정의로운 목표는 겸허함과 절제 속에서 조심스럽게 추구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종종 정의로운 이상은 정의롭지 않은 수단까지도 정당화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국가 안전을 위해서는 법치와 인권의 이상 등이 보류될 수 있다고 생각한 부시 정권의 실책을 비판적으로 본다. 그가 대통령 취임 첫날에 관타나모 수용소 폐지를 위한 절차를 지시한 것은 그의 이러한 생각을 실천에 옮기려 한 것이다. 국제 관계에 대한 그의 생각은 이러한 미국의 현실 문제들을 넘어 일반화된다. 그는 세계의 모든 나라에 우호 관계를 확장할 것을 희망하고 부유한 나라들이 세계 빈곤의 극복 그리고 지구 환경 문제의 해결에 힘써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당면한 가장 급박한 문제는 오늘의 경제 위기이다. 그의 금융 구제책과 공공사업의 계획은 이미 공표된 바 있다. 취임사에서 그는 다시 도로와 다리, 전기와 전자 통신망을 짓겠다는 것을 확인한다. 바다와 바람과 땅에서 추출될 수 있는 환경친화적인 에너지 개발을 촉진하겠다는 것도 이미 천명되었던 정책이다. 이러한 내용이 취임사에 언급된 것은 아니나, 오바마 내각에서 에너지 장관에 임명된 스티븐 추(Steven Chu)는 그동안 새로운 에너지 개발에 관계된 많은 아이디어를 내놓은, 노벨상을 받은 물리학자이다. 그의 제안에는 공해 없는 새로운 에너지원의 개발과 함께, 전국적인 전선망의 신축과 개축, 개인 주택, 공공건물의 광범위한 단열 계획 등이 포함되어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미 환경 기술의 개발과 현실화를 위하여 1500억달러의 배정을 결정했다. 그의 환경 에너지 계획은 미국과 세계의 미래에 지속적인 의미를 가질 것이다.
경제 회복을 위한 다른 전략도 단순한 원상복구를 말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의 경제 위기는 시장 경제의 위기이다.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 연설은 조용하면서도 근본적인, 시장 경제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문제는 시장이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부(富)의 창조와 자유 신장에서의 시장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켜보는 눈”을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감시의 눈은 경제와 아울러 정치의 눈을 말한다. 시장이 부자만을 위하여 기능할 때, 그것은 국민 전체의 번영을 가져오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국내총생산(GDP)이 얼마나 큰가보다 그것이 얼마나 모든 일하는 사람들에게 풍요를 제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시장의 의미는 그것이 ‘공동선’에 이르는 길이라는 데에 있다 -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공동선은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하고 자기 나름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데에서 실현된다. 경제의 기본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주거와 적절한 임금의 직장을 마련하고 “위엄을 가진 은퇴”를 가능하게 하며, 의료와, 복지와 교육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권리이며 미국의 사회적 의무라고 말하기 위하여 그는 보통 사람들의 노력의 결집으로 이루어진 나라가 미국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일보다는 여가를 앞세우고, “부와 귀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 미국의 가치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행동하고 노동하고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의 역할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노동 속에서 이름이 없는” 사람들, “스위트숍 (저임금, 열악한 환경의 공장)에서 일하고, 서부를 개척하고, 채찍을 견뎌내고 땅을 갈고” “손이 닳도록 일한 사람들”이다.
이러한 미국의 신화에 대한 언급은 물론 앞으로의 경제 정책이 이러한 사람들에게 고루 적정한 수준의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라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투쟁의 격화를 통해서 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가 말하는,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적정한 행복은 이미 미국의 건국 이념에 천명되어 있고 필요한 것은 그것을 다시 상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미국의 정치를 목죄고 있는 “작은 불만과, 거짓 약속과 비난과 낡은 독단론에 끝을 내고” 공동선을 향하여 다 함께 노력하는 일이다. 북돋워야 할 것은 “정직과 일과, 용기와 공정성, 관용과 호기심, 신의와 애국심” 그리고 책임감이다.
경제의 기본은 ‘공동선’의 실천
오바마 대통령의 사회통합의 비전은 너무나 안이한 생각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미국 밖의 눈으로 볼 때 더 중요한 문제점은 그의 웅변이 지나치게 미국 역사의 신화와 강대국으로서의 미국의 힘을 강조하는, 애국주의에 호소하는 것이어서 참으로 보편적인 도덕적 차원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들의 현실적 의미를 떠나서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사가 우리에게 상기해주는 것은 통합적 인간 화해의 비전이야말로 정치를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근본이라는 사실이다. 독단론과 그것에 의하여 촉발되는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의 정치에서 쉽게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이것이 아닌가 한다.
입력 : 2009-01-28 18:10:57ㅣ수정 : 2009-01-28 18:10:58
지난해 10월 독일 마인츠 대학의 신학부 마리우스 라이저 교수가 겨울학기만 마치고 사직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얼마 전에는 사임 이유를 설명한 에세이가 프랑크푸르트의 한 신문에 실렸다.
라이저 교수가 사임하려는 것은 지금 독일과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학 개혁에 항의하는 뜻에서이다. 유럽 연합의 교육부 장관과 교육 관계자들은 1999년 볼로냐에서 소위 ‘볼로냐 과정’이라고 불리게 된 협약을 맺었다. 이것은 지역 안에서의 여러 대학을 묶어 유럽을 하나의 ‘고등교육 공간’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2010년까지 완성될 이 계획은 각 지역 대학들의 교과과정, 학생과 교수들의 왕래, 학점 교환 제도의 새로운 정비를 요구한다. 라이저 교수가 이 협약의 진행에 반대하는 것은 그것이 대학들의 자율성과 학문의 자유를 제약하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지역 통합의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대학 간의 교류가 용이해지려면, 일정한 형식에 맞추어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수업 연한의 조정, 수업 과정과 방법의 규격화 등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많은 경우 외면적 형식의 부과는 내면적 충실을 어렵게 한다. 그리하여 독자적이고 고유한 학문이 자리를 찾기 어렵게 된다. 표준화된 과정의 수업은 개인으로서의 고유한 인격과 온축(蘊蓄)이 있는 교수보다는 일정하게 훈련된 강사에 의하여 더 능률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 그리고 제도적 정비 속에서 대학은 규격 상품을 주문 생산하는 ‘공부 공장’ 또는 직업 훈련소가 된다.
안타까운 학문의 순수성 소멸
이러한 변화는 넓은 범위의 제도적 통합, 그리고 그에 따른 관료화에서 오는 불가피한 결과라고만 할 수는 없다. 어떤 것이 되었든 실용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시대의 정신이다. 볼로냐 협약에 따라 열린 2004년의 대학 총장 회의에서 나온 문서는 그것을 잘 드러내 준다. 라이저 교수가 언급하고 있는 이 문서의 표제어들, ‘시장 전략, 경쟁력, 범유럽 교수 모집과 채용, 대학 경영, 과학기반 경제, 품질, 능률, 시너지 효과, 혁신 능력, 사회적, 경제적 발전 잠재력’ 등등의 말은 대학의 이념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물질주의와 공리주의라는 것을 말한다. 개인적으로도 대학은 오로지 특정 직업을 위한 훈련장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대학생에게 대학의 의미는 부와 귀-물질적 보상과 명예를 얻기 위하여 거쳐야 하는 통로일 뿐이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대하여 라이저 교수는 대학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실용적 의미를 가진 기구가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대학은, 존 헨리 뉴먼의 말을 빌려, “눈에 띄게 번쩍이는 상품들의 장터”도 아니고 인적 자원으로 상품을 제조하는 “공장”도 아니다. 대학의 사명은 학문을 학문 자체로서 추구하는 것이다. 지식 전달도 반드시 학문의 핵심 기능이라 할 수 없다. 지식만의 전달은 ‘스스로의 피상성을 알지 못하는 피상성’을 길러낸다. 교육의 핵심은 정신의 도야이다. 앎과 인식과 지혜는 여기에서 나와야 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의 의미를 갖는다. 정신이 중요하다고 해서, 그것이 일정한 도덕적 가르침을 주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곤란하다. 정신과학의 분야에서도 대학의 기능은 독단적 확신을 심어주고 지식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라이저 교수의 전공 분야인 신학에서까지도, 그 목적이 종교 교육 또는 설교가 되면, 신학은 학문이기를 그치게 된다. 핵심은 자유로운 정신이다. 위대한 학문적 업적은 자율과 자유의 정신에서만 이루어진다.
대학은 사회에 봉사할 필요가 없는 것인가? 자유로운 정신을 통하여 높은 학문의 수준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대학의 사회적 기여라고 라이저 교수는 생각한다.
새로 규격화되는 교과 과정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그가 열거하는 바 경제와 경영의 관점에서 대학을 파악하는 유럽 대학 총장들의 용어들은 그대로 한국의 대학과 정신생활의 기본 철학을 나타내는 말들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전시대의 사상가들을 인용하여 말하는 학문의 이상도 우리 전통에서의 그에 대한 인식과 비슷하다. 다만 그것을 우리는 더 철저하게 잊었을 뿐이다. 가장 간단하게 말하여, 위기지학(爲己之學)이란 말은 바로 비슷한 학문의 이상을 나타낸다. 이것은 학문이 이기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한 학문-다른 사람의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얻으려고 하는,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서 스스로 얻어질 깨달음의 수업이라는 것을 말한다. 물론 사회와 정치는 유학의 핵심적인 관심사이다. (이에 대한 지나친 관심, 그것이 문제점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론과 이상에 있어서 학문의 목적은 학문 자체에 있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러한 순수한 학문의 연수야말로 공적인 책임을 바르게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길이었다. 물론 현실에 있어서는 학문을 국가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개인적으로 그것은 과거나 출세-거의 전적으로 세간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이러한 학문의 이상은 존재했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안티테제로서의 학문과 정신적 추구의 이상까지도 완전히 소멸된 것이 오늘의 우리 현실이다. 지금 학문은 개인적으로는 부귀의 수단이다. 그러면서 명분상 학문적 수행은 국가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경제 위주의 경우가 아니라도, 학문은 다른 명분으로 정당화되어야 한다. (오늘날 사실 학문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일에서 일 자체의 존귀함은 사라져 버렸다. 하나의 일에 대한 헌신은 삶의 협소화를 뜻하지 않는다. 하나를 위한 정진은 정신을 다른 정진에로 열리게 한다. 자유로운 정신의 선물의 하나가 이 열림의 자세이다.)
대학 학문연구의 토대는 소명감
학문에서의 순수성 소멸은 세계적 추세이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특히 두드러진 것일 뿐이다. 미국의 저명한 문학이론가 스탠리 피시는 최근에 자신과 같은 사람은 순수한 인문학자로서 마지막 세대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토로한 바 있다. 그는 이것을 불가항력의 시대적 추이로 받아들인다. 라이저 교수는 독일의 대학에서 대학의 새로운 변화에 대하여 불평은 있지만, 저항도 비판도 없다고 말한다. 프로젝트 연구비, 업적에 따른 급료, 자의적인 기준의 평가 등의 제도가 교수들을 옭아매고 있다. 대학의 교원들은 관료제 속에서 완전히 무력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라이저 교수는 자기를 희생하여 비판의 소리를 내려는 것이다. 그는 ‘모집’에 응하여 교수로 채용된 것이 아니라, ‘부름’에 답하여 교수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 ‘부름’이란 독일어에서 ‘직업’이라는 단어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는 소명감이 직업의 토대라는 뜻이 들어 있다. 이것은 특히 대학의 학문 연구에서 그러하고 공직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모든 직업은 일단 그 자체로 존귀한 것의 부름에 답하는 행위이다. 라이저 교수는 이제 대학의 교수직은 부름의 직책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사직을 결심했다. 겨울학기가 끝나는 지금까지 대학에서 그의 사표를 수리했다는 소식은 없다. 라이저 교수의 사임 선언이 작은 사건이라면 작은 사건이지만, 우리에게도 깊은 의미를 갖는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지역 통합의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대학 간의 교류가 용이해지려면, 일정한 형식에 맞추어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수업 연한의 조정, 수업 과정과 방법의 규격화 등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많은 경우 외면적 형식의 부과는 내면적 충실을 어렵게 한다. 그리하여 독자적이고 고유한 학문이 자리를 찾기 어렵게 된다. 표준화된 과정의 수업은 개인으로서의 고유한 인격과 온축(蘊蓄)이 있는 교수보다는 일정하게 훈련된 강사에 의하여 더 능률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 그리고 제도적 정비 속에서 대학은 규격 상품을 주문 생산하는 ‘공부 공장’ 또는 직업 훈련소가 된다.
안타까운 학문의 순수성 소멸
이러한 변화는 넓은 범위의 제도적 통합, 그리고 그에 따른 관료화에서 오는 불가피한 결과라고만 할 수는 없다. 어떤 것이 되었든 실용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시대의 정신이다. 볼로냐 협약에 따라 열린 2004년의 대학 총장 회의에서 나온 문서는 그것을 잘 드러내 준다. 라이저 교수가 언급하고 있는 이 문서의 표제어들, ‘시장 전략, 경쟁력, 범유럽 교수 모집과 채용, 대학 경영, 과학기반 경제, 품질, 능률, 시너지 효과, 혁신 능력, 사회적, 경제적 발전 잠재력’ 등등의 말은 대학의 이념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물질주의와 공리주의라는 것을 말한다. 개인적으로도 대학은 오로지 특정 직업을 위한 훈련장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대학생에게 대학의 의미는 부와 귀-물질적 보상과 명예를 얻기 위하여 거쳐야 하는 통로일 뿐이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대하여 라이저 교수는 대학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실용적 의미를 가진 기구가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대학은, 존 헨리 뉴먼의 말을 빌려, “눈에 띄게 번쩍이는 상품들의 장터”도 아니고 인적 자원으로 상품을 제조하는 “공장”도 아니다. 대학의 사명은 학문을 학문 자체로서 추구하는 것이다. 지식 전달도 반드시 학문의 핵심 기능이라 할 수 없다. 지식만의 전달은 ‘스스로의 피상성을 알지 못하는 피상성’을 길러낸다. 교육의 핵심은 정신의 도야이다. 앎과 인식과 지혜는 여기에서 나와야 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의 의미를 갖는다. 정신이 중요하다고 해서, 그것이 일정한 도덕적 가르침을 주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곤란하다. 정신과학의 분야에서도 대학의 기능은 독단적 확신을 심어주고 지식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라이저 교수의 전공 분야인 신학에서까지도, 그 목적이 종교 교육 또는 설교가 되면, 신학은 학문이기를 그치게 된다. 핵심은 자유로운 정신이다. 위대한 학문적 업적은 자율과 자유의 정신에서만 이루어진다.
대학은 사회에 봉사할 필요가 없는 것인가? 자유로운 정신을 통하여 높은 학문의 수준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대학의 사회적 기여라고 라이저 교수는 생각한다.
새로 규격화되는 교과 과정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그가 열거하는 바 경제와 경영의 관점에서 대학을 파악하는 유럽 대학 총장들의 용어들은 그대로 한국의 대학과 정신생활의 기본 철학을 나타내는 말들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전시대의 사상가들을 인용하여 말하는 학문의 이상도 우리 전통에서의 그에 대한 인식과 비슷하다. 다만 그것을 우리는 더 철저하게 잊었을 뿐이다. 가장 간단하게 말하여, 위기지학(爲己之學)이란 말은 바로 비슷한 학문의 이상을 나타낸다. 이것은 학문이 이기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한 학문-다른 사람의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얻으려고 하는,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서 스스로 얻어질 깨달음의 수업이라는 것을 말한다. 물론 사회와 정치는 유학의 핵심적인 관심사이다. (이에 대한 지나친 관심, 그것이 문제점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론과 이상에 있어서 학문의 목적은 학문 자체에 있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러한 순수한 학문의 연수야말로 공적인 책임을 바르게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길이었다. 물론 현실에 있어서는 학문을 국가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개인적으로 그것은 과거나 출세-거의 전적으로 세간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이러한 학문의 이상은 존재했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안티테제로서의 학문과 정신적 추구의 이상까지도 완전히 소멸된 것이 오늘의 우리 현실이다. 지금 학문은 개인적으로는 부귀의 수단이다. 그러면서 명분상 학문적 수행은 국가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경제 위주의 경우가 아니라도, 학문은 다른 명분으로 정당화되어야 한다. (오늘날 사실 학문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일에서 일 자체의 존귀함은 사라져 버렸다. 하나의 일에 대한 헌신은 삶의 협소화를 뜻하지 않는다. 하나를 위한 정진은 정신을 다른 정진에로 열리게 한다. 자유로운 정신의 선물의 하나가 이 열림의 자세이다.)
대학 학문연구의 토대는 소명감
학문에서의 순수성 소멸은 세계적 추세이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특히 두드러진 것일 뿐이다. 미국의 저명한 문학이론가 스탠리 피시는 최근에 자신과 같은 사람은 순수한 인문학자로서 마지막 세대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토로한 바 있다. 그는 이것을 불가항력의 시대적 추이로 받아들인다. 라이저 교수는 독일의 대학에서 대학의 새로운 변화에 대하여 불평은 있지만, 저항도 비판도 없다고 말한다. 프로젝트 연구비, 업적에 따른 급료, 자의적인 기준의 평가 등의 제도가 교수들을 옭아매고 있다. 대학의 교원들은 관료제 속에서 완전히 무력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라이저 교수는 자기를 희생하여 비판의 소리를 내려는 것이다. 그는 ‘모집’에 응하여 교수로 채용된 것이 아니라, ‘부름’에 답하여 교수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 ‘부름’이란 독일어에서 ‘직업’이라는 단어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는 소명감이 직업의 토대라는 뜻이 들어 있다. 이것은 특히 대학의 학문 연구에서 그러하고 공직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모든 직업은 일단 그 자체로 존귀한 것의 부름에 답하는 행위이다. 라이저 교수는 이제 대학의 교수직은 부름의 직책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사직을 결심했다. 겨울학기가 끝나는 지금까지 대학에서 그의 사표를 수리했다는 소식은 없다. 라이저 교수의 사임 선언이 작은 사건이라면 작은 사건이지만, 우리에게도 깊은 의미를 갖는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입력 : 2009-02-11 18:15:21ㅣ수정 : 2009-02-11 23:43:29
[김우창칼럼]사건에서 제도로
입력 : 2009-02-25 18:25:18ㅣ수정 :
용산 재개발 철거민 농성 현장에서 일어난 참사 사건은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자명한 듯한 사건도 재구성은 쉽지 않다. 그런데다가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사람들이 착잡하게 얽혀 있는 일이어서, 사건이 쉽고 공정하게 밝혀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비판의 정당성을 떠나서 이러한 비판이 있고 또 그러한 비판에 근거가 없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은 우리 사회 질서의 현주소가 어디에 있는가를 느끼게 한다.
경찰이나 검찰의 조사에 더하여 또 다른 조사 담당자들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다른 나라 같으면, 이미 그런 조사단이 조직되었을 성싶지만, 국회와 같은 기관에서 조사단을 구성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한다. 반드시 정부 당국의 조사가 믿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말은 아니다. 조사는 진상을 있는 대로 밝히고 책임자를 가려내는 데에만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 일어난 일을 규명하는 일 못지않게 또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래에 다시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방안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국회가 참으로 정치 싸움을 넘어서 그러한 것을 조사하고 연구할 수 있겠는가를 의심할 사람들이 있을는지 모른다. 그만큼 국회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크지 않은 것이다.
용산 참사, 국회차원 조사 필요
참사가 불러 일으킨 격정(激情)에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조사하는 경우에도 출발은 사건 현장에서 일어난 일일 것이다. 경찰의 과잉 진압이 참사의 요인이라면, 그 책임도 밝혀져야겠지만, 앞으로의 대책이라는 관점에서는 진압 과정의 절차에 대한 규정과 훈련이 적절한 것인가가 중요한 조사와 고려의 대상이 될 것이다. 농성자 측에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그것을 방지할 절차상의 조처는 별로 없을는지 모른다. 그렇다는 것은 데모나 농성은 그 의도에서부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공적 절차를 깨뜨림으로써 자신들의 의사를 보여주고 관철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격렬성을 줄이고 이번 참사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대책은 연구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러한 데모에서는, 어느 쪽으로나 제삼자의 개입이 사건의 규모를 크게 하는 것일 터인데, 그 문제에 대한 연구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단지 제삼자의 개입을 금지한다는 것으로 귀착한다면, 그것은 현실성이 없는 너무 안이한 답이 될 것이다.
사건은 물론 철거와 보상 문제로 인하여 일어났다. 보상제도를 정당하고 또 현실적인 관점에서 정리할 수 있을까? 보도에 의하면 보상 요구에는 권리금이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문제의 하나는 보상금의 공적인 위치가 불분명하다는 점일 것이다. 권리금은 현실로 존재하면서 형식상은 존재하지 않는 유령과 같은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점이 그것을 제대로 보상하지 않으려는 철거자 측의 실리에 끼어들 수 있다. 재산상의 모든 권리가 소유권에 기초한 제도 속에서 권리금을 어떻게 법률적 명분을 가진 것으로 만드느냐 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연구 대상이 될 것이다. 공식제도 속에 편입되지 않는 현실 사항은 쉽게 분쟁의 원인이 된다. 중재를 목적으로 하는 제삼자의 개입은 이해당사자들의 격돌을 완화하는 데 한 몫을 담당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에 국가, 아니라면 보증회사와 같은 것이 참여하여 그것을 공식화하는 방법과 같은 것은 없을까? 전체적으로 보상금 문제에서도 그 적정성을 중재 심사할 수 있는 기구 같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건축물의 건축, 철거 그리고 재건축은, 관계 법과 조례 또는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 한, 소유주의 자유재량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토지와 건축은 사람이 살아가는 근본과 관계되는 시설물이기 때문에 사회 공동체가 적정한 것으로 판단하는 여러 규칙에 의하여 엄격하게 통제될 수밖에 없다. 토지의 공급은, 다른 상품과는 달리, 절대적으로 한정되어 있다. 개인 소유가 된다고 하더라도 토지의 개인적 사용은 다른 사람과 사회에 직접적으로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토지는 상품이나 개인적 소유물의 성격을 가지면서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공유재산으로서의 성격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도시 공간의 밀집 속에서 건축물도 거의 토지나 비슷한 제한 조건 속에 존재한다. 개인의 자유를 국가의 기본으로 하는 나라들에서도 토지와 건축물은 극히 까다로운 공적 규제와 배려의 연결망 속에 존재한다.
이것은 주거지의 경우에 특히 그러하다. 많은 나라에서 주거 문제는 국가에서 해결해야 하는 과제로 되어 있다. 공공 책임은 서민 주택의 공급, 임대 계약이나 재건축에 대한 엄격한 지침, 이에 관련되는 국가보조금 등 - 주거의 안정을 목표로 하는 여러 정책에 표현된다. 주택 임대 계약의 경우에도 주거 안정을 위한 많은 고려가 따르게 된다. 계약 기간만 해도 그것을 너무 짧게 또는 길게 잡아 입주자의 생활을 흔들어 놓는 일이 없게 한다. 그것이 꼭 옳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유럽의 어떤 나라에서는 99년의 임대 기간도 존재한다고 들은 일이 있다. 이것은 임대 주택을 자기 집처럼 쓸 수 있게 하려는 것이라 할 것이다. 재건축의 기간도 엄격하게 규정한다. 대개는 너무 짧은 것이 문제이지만, 너무 길게 하여 집이 퇴락하는 것을 방치하지 않게 하는 것도 고려된다.
재발 방지방안 강구 정치의 몫
상업지역에서 생활 관계의 규제는 조금 더 유연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금전적 이익보다는 공적인 고려이다. 첫째의 고려는 생활 안정의 기초를 흔들지 않는 것이다. 용산에서처럼 생존 차원의 생업이 관련된 경우, 문제는 단순히 상업적 이해관계로만 처리될 수 없다. 입주, 퇴거, 철거 등의 적절한 처리는 사회 입법과 제도를 통하여 행해져야 한다.
오랜 개발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발로 밟고 있어야 하는 자리, 삶이 뿌리내려야 할 땅이 전혀 안정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그 큰 원인은 모든 토지와 건축물이 투기 부동산이 된 데에 있다. 이것이 이러한 문제에 사회적 고려가 들어갈 수 없게 하고 도시 공간의 합리화를 어렵게 한다. 이것은 건물을 짓고 길을 내고 하는 일로 해결되지 아니한다. 건물이 철거된다고 할 때, 그것은 전반적인 구획 계획 - 사회와 미학과 점포와 기업 경영을 하나로 연결하는 공간 계획과는 관계가 없는 경우가 많다. 전체 공간에 대한 고려 없이 새로 짓는 건물들을 기존 건물이 하루 아침에 헐려야 할 건물처럼 보이게 하기도 한다. 어떻게 해야 도시 계획, 국토 계획이 나라를 건전한 삶의 터전이 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 핵심적인 것이 사회적 고려이다.
여기에서 이러한 것들을 언급하는 것은 전문적인 식견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목적은 우리의 정치와 사회 문화를 생각해보려는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그때 그때의 사건에 흥분한다. 거기에 둔감한 것도 문제이지만, 일어나서는 아니 될 사건이 일어났다면, 그것을 방지할 제도를 강구해야 한다. 그것이 정치가 하는 일이다. 문제의 하나하나를 제도적으로 풀어나가면서 사회 전체의 삶을 튼튼한 기초 위에 세우려는 노력이 정치이다. 그러나 사건들을 쟁점이 되게 하는 일에는 빠르면서 더 큰 생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 우리 정치풍습이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경찰이나 검찰의 조사에 더하여 또 다른 조사 담당자들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다른 나라 같으면, 이미 그런 조사단이 조직되었을 성싶지만, 국회와 같은 기관에서 조사단을 구성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한다. 반드시 정부 당국의 조사가 믿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말은 아니다. 조사는 진상을 있는 대로 밝히고 책임자를 가려내는 데에만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 일어난 일을 규명하는 일 못지않게 또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래에 다시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방안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국회가 참으로 정치 싸움을 넘어서 그러한 것을 조사하고 연구할 수 있겠는가를 의심할 사람들이 있을는지 모른다. 그만큼 국회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크지 않은 것이다.
용산 참사, 국회차원 조사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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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데모에서는, 어느 쪽으로나 제삼자의 개입이 사건의 규모를 크게 하는 것일 터인데, 그 문제에 대한 연구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단지 제삼자의 개입을 금지한다는 것으로 귀착한다면, 그것은 현실성이 없는 너무 안이한 답이 될 것이다.
사건은 물론 철거와 보상 문제로 인하여 일어났다. 보상제도를 정당하고 또 현실적인 관점에서 정리할 수 있을까? 보도에 의하면 보상 요구에는 권리금이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문제의 하나는 보상금의 공적인 위치가 불분명하다는 점일 것이다. 권리금은 현실로 존재하면서 형식상은 존재하지 않는 유령과 같은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점이 그것을 제대로 보상하지 않으려는 철거자 측의 실리에 끼어들 수 있다. 재산상의 모든 권리가 소유권에 기초한 제도 속에서 권리금을 어떻게 법률적 명분을 가진 것으로 만드느냐 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연구 대상이 될 것이다. 공식제도 속에 편입되지 않는 현실 사항은 쉽게 분쟁의 원인이 된다. 중재를 목적으로 하는 제삼자의 개입은 이해당사자들의 격돌을 완화하는 데 한 몫을 담당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에 국가, 아니라면 보증회사와 같은 것이 참여하여 그것을 공식화하는 방법과 같은 것은 없을까? 전체적으로 보상금 문제에서도 그 적정성을 중재 심사할 수 있는 기구 같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건축물의 건축, 철거 그리고 재건축은, 관계 법과 조례 또는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 한, 소유주의 자유재량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토지와 건축은 사람이 살아가는 근본과 관계되는 시설물이기 때문에 사회 공동체가 적정한 것으로 판단하는 여러 규칙에 의하여 엄격하게 통제될 수밖에 없다. 토지의 공급은, 다른 상품과는 달리, 절대적으로 한정되어 있다. 개인 소유가 된다고 하더라도 토지의 개인적 사용은 다른 사람과 사회에 직접적으로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토지는 상품이나 개인적 소유물의 성격을 가지면서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공유재산으로서의 성격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도시 공간의 밀집 속에서 건축물도 거의 토지나 비슷한 제한 조건 속에 존재한다. 개인의 자유를 국가의 기본으로 하는 나라들에서도 토지와 건축물은 극히 까다로운 공적 규제와 배려의 연결망 속에 존재한다.
이것은 주거지의 경우에 특히 그러하다. 많은 나라에서 주거 문제는 국가에서 해결해야 하는 과제로 되어 있다. 공공 책임은 서민 주택의 공급, 임대 계약이나 재건축에 대한 엄격한 지침, 이에 관련되는 국가보조금 등 - 주거의 안정을 목표로 하는 여러 정책에 표현된다. 주택 임대 계약의 경우에도 주거 안정을 위한 많은 고려가 따르게 된다. 계약 기간만 해도 그것을 너무 짧게 또는 길게 잡아 입주자의 생활을 흔들어 놓는 일이 없게 한다. 그것이 꼭 옳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유럽의 어떤 나라에서는 99년의 임대 기간도 존재한다고 들은 일이 있다. 이것은 임대 주택을 자기 집처럼 쓸 수 있게 하려는 것이라 할 것이다. 재건축의 기간도 엄격하게 규정한다. 대개는 너무 짧은 것이 문제이지만, 너무 길게 하여 집이 퇴락하는 것을 방치하지 않게 하는 것도 고려된다.
재발 방지방안 강구 정치의 몫
상업지역에서 생활 관계의 규제는 조금 더 유연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금전적 이익보다는 공적인 고려이다. 첫째의 고려는 생활 안정의 기초를 흔들지 않는 것이다. 용산에서처럼 생존 차원의 생업이 관련된 경우, 문제는 단순히 상업적 이해관계로만 처리될 수 없다. 입주, 퇴거, 철거 등의 적절한 처리는 사회 입법과 제도를 통하여 행해져야 한다.
오랜 개발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발로 밟고 있어야 하는 자리, 삶이 뿌리내려야 할 땅이 전혀 안정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그 큰 원인은 모든 토지와 건축물이 투기 부동산이 된 데에 있다. 이것이 이러한 문제에 사회적 고려가 들어갈 수 없게 하고 도시 공간의 합리화를 어렵게 한다. 이것은 건물을 짓고 길을 내고 하는 일로 해결되지 아니한다. 건물이 철거된다고 할 때, 그것은 전반적인 구획 계획 - 사회와 미학과 점포와 기업 경영을 하나로 연결하는 공간 계획과는 관계가 없는 경우가 많다. 전체 공간에 대한 고려 없이 새로 짓는 건물들을 기존 건물이 하루 아침에 헐려야 할 건물처럼 보이게 하기도 한다. 어떻게 해야 도시 계획, 국토 계획이 나라를 건전한 삶의 터전이 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 핵심적인 것이 사회적 고려이다.
여기에서 이러한 것들을 언급하는 것은 전문적인 식견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목적은 우리의 정치와 사회 문화를 생각해보려는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그때 그때의 사건에 흥분한다. 거기에 둔감한 것도 문제이지만, 일어나서는 아니 될 사건이 일어났다면, 그것을 방지할 제도를 강구해야 한다. 그것이 정치가 하는 일이다. 문제의 하나하나를 제도적으로 풀어나가면서 사회 전체의 삶을 튼튼한 기초 위에 세우려는 노력이 정치이다. 그러나 사건들을 쟁점이 되게 하는 일에는 빠르면서 더 큰 생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 우리 정치풍습이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입력 : 2009-02-25 18:25:18ㅣ수정 :
김우창칼럼]어느 소박하고 깊은 삶
입력 : 2009-03-11 18:01:41ㅣ수정 :
올해 초 노르웨이의 철학자 아르네 내스(Arne Naess)가 97세의 나이로 사거했다. 우리 매체들에 이미 보도되었는지 모르나, 그의 죽음은 추념(追念)에 값하는 사건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의 다른 철학적 업적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되겠지만, 그는 세계 환경 운동과 사상에 하나의 큰 계기를 마련한 철학자였다.
환경은 전지구적인 산업화화 더불어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가장 커다란 조건이면서 가장 크게 걱정해야 하는 문제가 되었다. 우리는 그날그날 살아가는 데에서도 오염된 공기, 쓰레기, 독소를 내뿜는 생산품 등을 통해서 환경 문제에 부딪힌다. 더 큰 차원에서 이것은 공기와 산천의 오염, 지구 자원의 고갈, 기후변화 등으로 집약되어 국가나 국제적인 차원의 당면 과제가 된다. 인간의 자연과의 관계가 재조정 또는 재설정되어야 한다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 대체로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은 인간의 삶의 조건이 악화되고 자원이 고갈되어 간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내스는 환경을 인간의 실리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을 너무 ‘얄팍한’ 것이라 하고 ‘깊은 생태학’이라는 이름으로 인간 중심 자연관에 ‘깊은 질문’을 제기하고자 했다. 이 질문은 오늘의 삶의 모습을 새로 살피게 하면서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종교적 질문과 성찰을 촉구한다.
아르네 내스의 ‘깊은 생태학’
자연을 자연으로서 보전하는 일은 동시에 높은 차원에서의 인간성 실현을 위한 필수 조건을 보전하는 일이다. 사람은 자연의 일부이다. 자연에서 모든 생명체는-하나 하나의 인간은 물론, 곤충을 포함하여 동물이나 식물은 다같이 동등하게 삶의 다양성과 풍요를 나타낸다. 인간이 자기를 실현하는 것은 이러한 생명계 그리고 자연과의 일체성 속에서만 가능하다. 사람의 진정한 자아는 생태계적 자아이다. 그 실현을 위해서는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의식이 있어야 한다. 거기에 이르는 데에는 정신적·물질적 수련이 있어야 한다. 철학적·종교적 명상은, 불교나 도교의 정신 수련이나 마찬가지로 이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니까 자연을 손상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삶 자체를 손상하는 것이다. 사람은 있는 대로의 자연에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
인간의 참 모습에 대한 진리를 깨닫고 또 그것을 고려하는 사회적 이상을 바로 세우기가 지난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지금의 사람들은 시류에 휩싸이고 광고에 지배되어 어느 시대보다 ‘철학적·윤리적 불구자’가 되었다. 그들은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다. 사람의 삶에 필요한 것들에는 ‘음식, 물, 주거’가 있다. 또 그것을 넘어서는 ‘사랑, 놀이, 예술적 표현, 자기가 가까이 느끼는 자연과의 친밀한 관계, 또는 자연 전체와의 관계’가 있다. 어떤 것도 과장된 형태로 표현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필요의 충족을 지나치게 금욕적인 기율로 억제하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니다. 그중에도 사람의 물질적 필요는, 미국의 생태학 운동가 빌 드볼과 조지 세션스가 내스의 생각을 정리하여 말한 것을 빌리면, 소비문화가 만들어내는 ‘가짜 필요와 파괴적인 욕망’이 아니라 ‘우아하게 소박한 물질적 필요-그러면서 더 높은 자아실현의 목적에 봉사하는 물질적 필요’가 되어야 한다.
본래 빈 학파의 논리실증주의에서 출발한 내스에게 과학적 엄밀성은 철학적 사유의 중요한 기준이었다. 그는 정확한 언어 사용을 중시하여 자기주장을 위하여 사실을 왜곡하고 적수(敵手)의 입장을 뒤틀고 하는 시사 논쟁을 경계했다. 그러나 삶의 근본을 깨닫는 데에는 과학적으로 논증되지 않더라도, 정신적 수련과 그러한 전통에서 오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지적으로 파악되기보다는 체험에서 직접 얻어지는 통찰이다. 내스는 실천가였다. 그는 일찍이 1950년에 파키스탄의 힌두 쿠시 산맥의 7700m 높이의 티리치 미르 산을 최초로 등반한 노르웨이 등반대의 리더였다. 그러나 산악인으로서의 그의 기록은 명성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산에 대한 친밀감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었다. 그는 오슬로 대학의 철학교수로 취임하기 전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 느꼈던 할링스카르베트 산속에 작은 집을 짓고 70년간 많은 시간을 거기에서 보냈다. 자연과 일체가 되는 것이 그의 삶의 방법이었다.
이곳에서의 그의 삶은 위에서 말한 바 ‘우아하게 소박한 물질의’ 삶의 기준에도 미치지 않게 소박한 것이었다. 그의 모든 생활용품은 세 시간 내지 다섯 시간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 이 집으로 운반되어야 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물이 귀한 겨울에 다섯 동이의 물을 마련해놓으면 부(富)하다는 느낌을 갖는다고 했다. 자신이 필요한 것, 세상의 값 매김에 관계없이 그 자체로 값진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부한 것이다. 그릇을 씻거나 몸을 씻는 것도 최소화할 수밖에 없었다. 박테리아가 별로 없는 고산지대에서 씻는 것은 쌓여 있는 눈에 비벼대는 정도로 충분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의 등산화는 50년 내지 60년이 된 것이었다.
그를 생태활동가로 유명하게 한 것은 깊은 생태학에 대한 논문이 발표된 얼마 후 마르달 폭포의 댐 건설에 항의하여 다른 동료들과 함께 폭포 근처의 바위에 몸을 동여맨 사건이었다. 그의 정치 투쟁의 방법은 몸으로 막아내는 ‘직접행동’이었다. 노르웨이에 그린피스 지부가 생겼을 때, 그는 지부장이 되었고 노르웨이 녹색당의 의원 후보로 선거에 나서기도 했다.
개발만능 한국에 필요한 철학
그의 사상이나 정치 행각에 대한 가장 큰 비판은 아마 미국의 사회 사상가인 머리 북친의 비판일 것이다. 오늘의 생태계 문제는 단순히 산업문명의 결과라기보다는 사회구조의 산물이고 답은 사회 개조에서 찾아져야 하는데 내스가 그것을 잘못 짚었다는 것이다. 내스의 정책 제안의 하나는 세계 인구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지구에 맞는 인구는 1억명 정도라고 했다. 이것을 실천 강령으로 받아들인 어떤 환경 운동 그룹은 강제 불임수술, 빈곤 국가 식량원조 중단 등을 외치고 나왔다. 간디의 비폭력주의를 신봉하는 내스가 경악감을 표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위에 언급한 드볼과 세션스의 글은 ‘만인의 정의와 행복’이라는 추상적 이념의 꿈에 속지 말아야 한다는 로빈슨 제퍼스의 시구를 인용하고 있다. 내스는 강제력에 의한 사회 프로그램을 지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기가 단기적으로는 비관주의자이고 장기적으로는 낙관주의자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21세기는 암울한 세기가 되겠지만, 22세기쯤이면 좋은 시절이 올 것이라고 했다. 그때쯤이면, 자연친화적인 산업기술이 일반화하고 아이들이 자연 환경 속에서 자라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인간의 지혜 발달에 믿음을 걸어본 것이다.
내스의 깊은 생태학 또는 생태적 자아실현의 ‘생태지혜학 (echosophy)’으로 오늘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의 철학이 오늘의 문제를 밝히는 큰 거울이 되는 것임은 분명하다. 특히 한국처럼, 더 넓은 삶의 지혜의 견제와 균형을 멀리 떠난 정치와 경제 계획의 허영에 사로잡혀 있는 사회에서 그렇다. 그러한 관련이 없이도 아르네 내스는 사상에서나 삶의 실천에서나 전인적(全人的) 자아실현의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이었다. 그의 사거는 우리로 하여금 잠간 멈추어 생각을 가다듬게 한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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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네 내스의 ‘깊은 생태학’
자연을 자연으로서 보전하는 일은 동시에 높은 차원에서의 인간성 실현을 위한 필수 조건을 보전하는 일이다. 사람은 자연의 일부이다. 자연에서 모든 생명체는-하나 하나의 인간은 물론, 곤충을 포함하여 동물이나 식물은 다같이 동등하게 삶의 다양성과 풍요를 나타낸다. 인간이 자기를 실현하는 것은 이러한 생명계 그리고 자연과의 일체성 속에서만 가능하다. 사람의 진정한 자아는 생태계적 자아이다. 그 실현을 위해서는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의식이 있어야 한다. 거기에 이르는 데에는 정신적·물질적 수련이 있어야 한다. 철학적·종교적 명상은, 불교나 도교의 정신 수련이나 마찬가지로 이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니까 자연을 손상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삶 자체를 손상하는 것이다. 사람은 있는 대로의 자연에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
인간의 참 모습에 대한 진리를 깨닫고 또 그것을 고려하는 사회적 이상을 바로 세우기가 지난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지금의 사람들은 시류에 휩싸이고 광고에 지배되어 어느 시대보다 ‘철학적·윤리적 불구자’가 되었다. 그들은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다. 사람의 삶에 필요한 것들에는 ‘음식, 물, 주거’가 있다. 또 그것을 넘어서는 ‘사랑, 놀이, 예술적 표현, 자기가 가까이 느끼는 자연과의 친밀한 관계, 또는 자연 전체와의 관계’가 있다. 어떤 것도 과장된 형태로 표현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필요의 충족을 지나치게 금욕적인 기율로 억제하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니다. 그중에도 사람의 물질적 필요는, 미국의 생태학 운동가 빌 드볼과 조지 세션스가 내스의 생각을 정리하여 말한 것을 빌리면, 소비문화가 만들어내는 ‘가짜 필요와 파괴적인 욕망’이 아니라 ‘우아하게 소박한 물질적 필요-그러면서 더 높은 자아실현의 목적에 봉사하는 물질적 필요’가 되어야 한다.
본래 빈 학파의 논리실증주의에서 출발한 내스에게 과학적 엄밀성은 철학적 사유의 중요한 기준이었다. 그는 정확한 언어 사용을 중시하여 자기주장을 위하여 사실을 왜곡하고 적수(敵手)의 입장을 뒤틀고 하는 시사 논쟁을 경계했다. 그러나 삶의 근본을 깨닫는 데에는 과학적으로 논증되지 않더라도, 정신적 수련과 그러한 전통에서 오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지적으로 파악되기보다는 체험에서 직접 얻어지는 통찰이다. 내스는 실천가였다. 그는 일찍이 1950년에 파키스탄의 힌두 쿠시 산맥의 7700m 높이의 티리치 미르 산을 최초로 등반한 노르웨이 등반대의 리더였다. 그러나 산악인으로서의 그의 기록은 명성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산에 대한 친밀감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었다. 그는 오슬로 대학의 철학교수로 취임하기 전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 느꼈던 할링스카르베트 산속에 작은 집을 짓고 70년간 많은 시간을 거기에서 보냈다. 자연과 일체가 되는 것이 그의 삶의 방법이었다.
이곳에서의 그의 삶은 위에서 말한 바 ‘우아하게 소박한 물질의’ 삶의 기준에도 미치지 않게 소박한 것이었다. 그의 모든 생활용품은 세 시간 내지 다섯 시간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 이 집으로 운반되어야 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물이 귀한 겨울에 다섯 동이의 물을 마련해놓으면 부(富)하다는 느낌을 갖는다고 했다. 자신이 필요한 것, 세상의 값 매김에 관계없이 그 자체로 값진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부한 것이다. 그릇을 씻거나 몸을 씻는 것도 최소화할 수밖에 없었다. 박테리아가 별로 없는 고산지대에서 씻는 것은 쌓여 있는 눈에 비벼대는 정도로 충분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의 등산화는 50년 내지 60년이 된 것이었다.
그를 생태활동가로 유명하게 한 것은 깊은 생태학에 대한 논문이 발표된 얼마 후 마르달 폭포의 댐 건설에 항의하여 다른 동료들과 함께 폭포 근처의 바위에 몸을 동여맨 사건이었다. 그의 정치 투쟁의 방법은 몸으로 막아내는 ‘직접행동’이었다. 노르웨이에 그린피스 지부가 생겼을 때, 그는 지부장이 되었고 노르웨이 녹색당의 의원 후보로 선거에 나서기도 했다.
개발만능 한국에 필요한 철학
그의 사상이나 정치 행각에 대한 가장 큰 비판은 아마 미국의 사회 사상가인 머리 북친의 비판일 것이다. 오늘의 생태계 문제는 단순히 산업문명의 결과라기보다는 사회구조의 산물이고 답은 사회 개조에서 찾아져야 하는데 내스가 그것을 잘못 짚었다는 것이다. 내스의 정책 제안의 하나는 세계 인구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지구에 맞는 인구는 1억명 정도라고 했다. 이것을 실천 강령으로 받아들인 어떤 환경 운동 그룹은 강제 불임수술, 빈곤 국가 식량원조 중단 등을 외치고 나왔다. 간디의 비폭력주의를 신봉하는 내스가 경악감을 표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위에 언급한 드볼과 세션스의 글은 ‘만인의 정의와 행복’이라는 추상적 이념의 꿈에 속지 말아야 한다는 로빈슨 제퍼스의 시구를 인용하고 있다. 내스는 강제력에 의한 사회 프로그램을 지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기가 단기적으로는 비관주의자이고 장기적으로는 낙관주의자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21세기는 암울한 세기가 되겠지만, 22세기쯤이면 좋은 시절이 올 것이라고 했다. 그때쯤이면, 자연친화적인 산업기술이 일반화하고 아이들이 자연 환경 속에서 자라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인간의 지혜 발달에 믿음을 걸어본 것이다.
내스의 깊은 생태학 또는 생태적 자아실현의 ‘생태지혜학 (echosophy)’으로 오늘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의 철학이 오늘의 문제를 밝히는 큰 거울이 되는 것임은 분명하다. 특히 한국처럼, 더 넓은 삶의 지혜의 견제와 균형을 멀리 떠난 정치와 경제 계획의 허영에 사로잡혀 있는 사회에서 그렇다. 그러한 관련이 없이도 아르네 내스는 사상에서나 삶의 실천에서나 전인적(全人的) 자아실현의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이었다. 그의 사거는 우리로 하여금 잠간 멈추어 생각을 가다듬게 한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입력 : 2009-03-11 18:01:41ㅣ수정 :
[김우창 칼럼]기업과 사회 윤리
현재 세계를 휩쓸고 있는 경제 위기에 대하여 여러 정부가 대책을 세우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수습되고 끝날지는 예측하기 쉽지 않다. 위기 극복에 성공하는 경우에도 원상이 복구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 체제의 성격 자체가 상당히 수정되지 않을까 한다.
경제 위기와 관련하여 지난 며칠 사이에 독일에서 중요한 뉴스가 된 것은 뮌헨의 히포 리얼 에스테이트(HRE)의 문제다. 독일 정부는 지난해 10월 독일에서 두 번째로 큰, 이 부동산 투자 은행의 구출을 결정했다. 그후 독일 정부는 올해 초까지 여기에 870억유로에 이르는 국가 예산을 투입했다. 이번에 문제가 된 것은 정부가 이 은행을 아주 접수할 가능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독일연방의회는 지난 20일 정부에서 제안한 ‘금융시장 안정회복에 관한 법’을 통과시켰다. 이것은 은행의 수용(收用) 또는 국유화를 허용하는 법이다. 그것을 넘어 이것은 경제 체제 자체를 재정의한다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기업 자유보다 공적 이해가 우선
물론 독일 정부는 이 법이 정부에 의한 기업의 장악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아주 구체적으로 HRE를 정상화하고 특히 거기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미국인 주주 그리스토퍼 플라워스의 소유주(株)를 수용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독일 정부는 구조조정을 위하여 HRE 주의 90% 이상을 확보하려 했지만, 24%의 주를 소유하고 있는 플라워스는 양도를 거부하고 있다. 2008년 6월 그의 HRE 주 매입가는 주당 22.50유로였다. 그런데 현재의 시장 시세는 80센트에 불과하다. 이 시장가로 그의 주를 매입하려는 독일 정부에 대하여, 플라워스는 적어도 3유로를 원한다. 증인으로 독일 연방의회에 출두한 그는 그의 주가 강제로 수용되면, 투자지역으로서의 독일의 평가가 나빠질 것이라고 되풀이하여 말했다.
플라워스의 경우는 최근에 영국의 브라운 총리가 경고한 금융보호주의의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개인 투자자에 대한 공정성, 그리고 외국 자본 유치라는 관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의 큰 의미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체제적인 데 있다. 연립정부의 기독교민주연합과 사민당은 이번 조처의 중대성을 의식하면서도 그것은 국가적 차원에서 ‘사회시장경제’를 지켜나가는 데에 불가피한 일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대하여 가장 강하게 문제를 제기한 것은 중도우파의 자유민주당이다. 은행수용법이 통과된 다음에 부(副)당수는, “오늘은 자유가 없어지는 날이다, 오늘로 국가의 기둥의 하나가 흔들린다.” “이 법은 우리 경제 질서에 대한 공격이다”라고 말했다. 이 법은 한 논평자가 말한 것처럼 시장자유주의의 ‘터부’를 깬 것이라 할 수 있다. 금융자산 수호 연합회라는 단체에서는 이것이 기본법(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사유자산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연방헌법재판소에 제소할 의사를 밝혔다. 자유민주당은 4월3일에 법안이 연방회의(Bundesrat)에 회부될 때 자민당 통치하의 주(州) 대표들이 법안 통과를 반대하고 그것을 위한 다른 법적인 절차도 취할 것이라는 방침을 발표했다. 법이 폐기될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은행강제수용법안이 간단히 승인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한다.
미국에서도 금융구체책과 관련해서 문제가 일고 있는 것은 우리 신문에도 보도되고 있다. 금융계의 혼란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미국에서 오히려 강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 분노의 표적이 된 것은 지금의 시점에서는 국민 세금으로 구제자금을 받고 막대한 보너스를 지급한 AIG 회사다. 얼마 전에 발표된 갤럽 폴에 의하면 90%의 응답자가 AIG 보너스에 대하여 분노하거나 부당하다는 느낌을 가진 것으로 조사됐다. 이 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분위기는 뉴욕타임스에 보도된 조용하다면 조용한 그러면서 심각한 이야기에서 느낄 수 있다. 뉴욕 주 검찰총장의 요구로 AIG사 보너스 수령자의 명단이 발표된 후 버스를 타고 부자 동네를 구경가는 기이한 관광 여행이 생겨났다. 그러한 버스에 월부금 때문에 집을 잃게 된 누이가 있는 목사와 실직한 노동자가 타고 있었는데, 그들은 AIG 부사장의 집을 찾아가 항의 편지를 전달하려는 생각이었다. 그 집 앞에서 한 청년이 그 편지를 빼앗아 여러 사람 앞에서 낭독하는 바람에 데모처럼 되었지만, 의도가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부사장은 자기가 받은 640만달러의 보너스를 되돌려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할 계획이었다고 말했다.
정치가 험해지는 사회 분위기와 같이 움직이는 것은 자연스럽다. AIG에 대하여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분노를 터뜨리고 하원에서 지불된 보너스에 90%의 세금을 부과하겠다는 결의가 있었다는 것은 이미 보도된 바 있다. 다시 오바마 대통령은 AIG와 같이 과도한 보수를 지급하는 것을 방지하는 조처를 강구하겠다고 말했다.
어떤 경우나 기업의 자유가 사회 전체의 공적인 이해에 우선할 수는 없다. 특히 기업의 소득이 비윤리적인 관행에 관계되고 사회 전체의 혼란에 이어질 때 그렇다. 독일에서는 경제와 사회적 고려가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법에 규정되어 있지만, 이번의 은행수용법은 이것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의 입법 의도를 설명하면서 구텐베르크 경제기술부 장관은 이것이 다른 방편이 없을 때의 ‘최종적 수단’이라는 것과 시효가 제한되어 있는 한시법이라면서 기업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구텐베르크 장관의 조심스러운 표현은 단순히 시장자유주의의 터부를 존중하려는 것이 아닐 것이다.
기업윤리 상실땐 위기 반복 가속
독일 경제기술부의 발표에 나온 ‘최종적 수단’이라는 말의 뉘앙스는 복잡하다. 구텐베르크 장관은 그것을 라틴어로 “울티미시마 라티오(ultimissima ratio)”라고 표현했다. ‘울티마 라티오(ultima ratio)’는 원래 ‘최종적인 정당성은 국가에 있다’는 뜻의 말로, 절대군주체제 하에서 통용되던 것이다. 그가 이 말을 사용한 것은 우연일 수 있지만, 그것은 권력에는 언제나 인간의 자유와 창의성-기업도 좋은 조건에서는 이것의 생산적 표현이다-을 억압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어떤 사회학자의 관찰에 의하면, 예로부터 상업이 부패의 가능성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가능성은 그것을 감시한다는 권력과 결합할 때 더 커지게 된다. 또 자기정당성의 확신에 찬 권력의 지배는 인간의 인간됨을 손상하는 결과를 낳는다.
자본주의는 모든 인간적 고려를 이윤의 횡포에 내맡기는 체제로 보인다. 그러나 원래 그것은 노동의 윤리화에서 유래한 역사적 업적이라고 말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언제나 그것은 인간의 총체적인 복지에 기여한다는 것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명분적 연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오늘의 자본주의이다. 이번의 위기가 보여준 것은 인간적 기율을 벗어날 때, 기업체제 자체가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업은 스스로를 위해서나 사회를 위해서나 사회 윤리에 이어져 있어야 한다. 기업과 사회 윤리의 연결은 너무나 쉽게 잊혀진다. 과거에도 이 연결을 되살리려는 노력이 있어야 했지만, 이번에 이것이 더 근본적이고 철저한 것이 되지 않는다면, 위기의 반복은 가속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입력 : 2009-03-25 18:04:43ㅣ수정 :경제 위기와 관련하여 지난 며칠 사이에 독일에서 중요한 뉴스가 된 것은 뮌헨의 히포 리얼 에스테이트(HRE)의 문제다. 독일 정부는 지난해 10월 독일에서 두 번째로 큰, 이 부동산 투자 은행의 구출을 결정했다. 그후 독일 정부는 올해 초까지 여기에 870억유로에 이르는 국가 예산을 투입했다. 이번에 문제가 된 것은 정부가 이 은행을 아주 접수할 가능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독일연방의회는 지난 20일 정부에서 제안한 ‘금융시장 안정회복에 관한 법’을 통과시켰다. 이것은 은행의 수용(收用) 또는 국유화를 허용하는 법이다. 그것을 넘어 이것은 경제 체제 자체를 재정의한다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기업 자유보다 공적 이해가 우선
물론 독일 정부는 이 법이 정부에 의한 기업의 장악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아주 구체적으로 HRE를 정상화하고 특히 거기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미국인 주주 그리스토퍼 플라워스의 소유주(株)를 수용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독일 정부는 구조조정을 위하여 HRE 주의 90% 이상을 확보하려 했지만, 24%의 주를 소유하고 있는 플라워스는 양도를 거부하고 있다. 2008년 6월 그의 HRE 주 매입가는 주당 22.50유로였다. 그런데 현재의 시장 시세는 80센트에 불과하다. 이 시장가로 그의 주를 매입하려는 독일 정부에 대하여, 플라워스는 적어도 3유로를 원한다. 증인으로 독일 연방의회에 출두한 그는 그의 주가 강제로 수용되면, 투자지역으로서의 독일의 평가가 나빠질 것이라고 되풀이하여 말했다.
플라워스의 경우는 최근에 영국의 브라운 총리가 경고한 금융보호주의의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개인 투자자에 대한 공정성, 그리고 외국 자본 유치라는 관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의 큰 의미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체제적인 데 있다. 연립정부의 기독교민주연합과 사민당은 이번 조처의 중대성을 의식하면서도 그것은 국가적 차원에서 ‘사회시장경제’를 지켜나가는 데에 불가피한 일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대하여 가장 강하게 문제를 제기한 것은 중도우파의 자유민주당이다. 은행수용법이 통과된 다음에 부(副)당수는, “오늘은 자유가 없어지는 날이다, 오늘로 국가의 기둥의 하나가 흔들린다.” “이 법은 우리 경제 질서에 대한 공격이다”라고 말했다. 이 법은 한 논평자가 말한 것처럼 시장자유주의의 ‘터부’를 깬 것이라 할 수 있다. 금융자산 수호 연합회라는 단체에서는 이것이 기본법(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사유자산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연방헌법재판소에 제소할 의사를 밝혔다. 자유민주당은 4월3일에 법안이 연방회의(Bundesrat)에 회부될 때 자민당 통치하의 주(州) 대표들이 법안 통과를 반대하고 그것을 위한 다른 법적인 절차도 취할 것이라는 방침을 발표했다. 법이 폐기될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은행강제수용법안이 간단히 승인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한다.
미국에서도 금융구체책과 관련해서 문제가 일고 있는 것은 우리 신문에도 보도되고 있다. 금융계의 혼란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미국에서 오히려 강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 분노의 표적이 된 것은 지금의 시점에서는 국민 세금으로 구제자금을 받고 막대한 보너스를 지급한 AIG 회사다. 얼마 전에 발표된 갤럽 폴에 의하면 90%의 응답자가 AIG 보너스에 대하여 분노하거나 부당하다는 느낌을 가진 것으로 조사됐다. 이 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분위기는 뉴욕타임스에 보도된 조용하다면 조용한 그러면서 심각한 이야기에서 느낄 수 있다. 뉴욕 주 검찰총장의 요구로 AIG사 보너스 수령자의 명단이 발표된 후 버스를 타고 부자 동네를 구경가는 기이한 관광 여행이 생겨났다. 그러한 버스에 월부금 때문에 집을 잃게 된 누이가 있는 목사와 실직한 노동자가 타고 있었는데, 그들은 AIG 부사장의 집을 찾아가 항의 편지를 전달하려는 생각이었다. 그 집 앞에서 한 청년이 그 편지를 빼앗아 여러 사람 앞에서 낭독하는 바람에 데모처럼 되었지만, 의도가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부사장은 자기가 받은 640만달러의 보너스를 되돌려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할 계획이었다고 말했다.
정치가 험해지는 사회 분위기와 같이 움직이는 것은 자연스럽다. AIG에 대하여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분노를 터뜨리고 하원에서 지불된 보너스에 90%의 세금을 부과하겠다는 결의가 있었다는 것은 이미 보도된 바 있다. 다시 오바마 대통령은 AIG와 같이 과도한 보수를 지급하는 것을 방지하는 조처를 강구하겠다고 말했다.
어떤 경우나 기업의 자유가 사회 전체의 공적인 이해에 우선할 수는 없다. 특히 기업의 소득이 비윤리적인 관행에 관계되고 사회 전체의 혼란에 이어질 때 그렇다. 독일에서는 경제와 사회적 고려가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법에 규정되어 있지만, 이번의 은행수용법은 이것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의 입법 의도를 설명하면서 구텐베르크 경제기술부 장관은 이것이 다른 방편이 없을 때의 ‘최종적 수단’이라는 것과 시효가 제한되어 있는 한시법이라면서 기업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구텐베르크 장관의 조심스러운 표현은 단순히 시장자유주의의 터부를 존중하려는 것이 아닐 것이다.
기업윤리 상실땐 위기 반복 가속
독일 경제기술부의 발표에 나온 ‘최종적 수단’이라는 말의 뉘앙스는 복잡하다. 구텐베르크 장관은 그것을 라틴어로 “울티미시마 라티오(ultimissima ratio)”라고 표현했다. ‘울티마 라티오(ultima ratio)’는 원래 ‘최종적인 정당성은 국가에 있다’는 뜻의 말로, 절대군주체제 하에서 통용되던 것이다. 그가 이 말을 사용한 것은 우연일 수 있지만, 그것은 권력에는 언제나 인간의 자유와 창의성-기업도 좋은 조건에서는 이것의 생산적 표현이다-을 억압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어떤 사회학자의 관찰에 의하면, 예로부터 상업이 부패의 가능성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가능성은 그것을 감시한다는 권력과 결합할 때 더 커지게 된다. 또 자기정당성의 확신에 찬 권력의 지배는 인간의 인간됨을 손상하는 결과를 낳는다.
자본주의는 모든 인간적 고려를 이윤의 횡포에 내맡기는 체제로 보인다. 그러나 원래 그것은 노동의 윤리화에서 유래한 역사적 업적이라고 말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언제나 그것은 인간의 총체적인 복지에 기여한다는 것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명분적 연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오늘의 자본주의이다. 이번의 위기가 보여준 것은 인간적 기율을 벗어날 때, 기업체제 자체가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업은 스스로를 위해서나 사회를 위해서나 사회 윤리에 이어져 있어야 한다. 기업과 사회 윤리의 연결은 너무나 쉽게 잊혀진다. 과거에도 이 연결을 되살리려는 노력이 있어야 했지만, 이번에 이것이 더 근본적이고 철저한 것이 되지 않는다면, 위기의 반복은 가속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김우창칼럼]격동기 보통의 삶
입력 : 2009-04-08 18:08:25ㅣ수정 :
얼마 동안 세계적으로 중요한 뉴스는 금융경제위기였다. G20 정상회의도 큰 뉴스지만, 그것도 주로 경제위기와 관련해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 위기는 모든 사람의 삶을 직접·간접적으로 흔들어 놓는 현상이다. 큰 볼거리 또는 스펙터클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충격적인 뉴스는 전임 대통령 주변, 정치계와 정부 기구 도처에 잠식해 들어간 부패에 관한 뉴스다. 이것은 정치의 민주화가 반드시 정치와 정부의 공공성을 높이는 것은 아니라는 교훈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를 더욱 당황하게 하는 것은 지난 정권이 도덕성을 크게 표방했던 정권이라는 사실이다. 도덕과 여러 좋은 명분들이 거짓으로 보여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소위 성 상납과 그 희생자 이야기는 조금 더 낮은 차원에서 우리 사회의 도덕 질서와 여성의 현 위치를 드러내준다. 가장 최근의 놀라운 뉴스는 북한에서 로켓을 쏘아 올린 것이다. 목적이 무엇이든, 그것이 국제적 긴장을 높이는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전쟁을 경험한 세대에게 그것은 전쟁의 망령이 살아남을 느끼게 한다.
자유의 가치 규범·도덕 통해 빛나
매체의 발달은 우리를 세계의 구석구석에서 전해오는 뉴스에 노출시킨다. 자신의 삶의 지평 안에서 일어나는 작고 큰 일들을 지표 삼아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에 이 지평은 넓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지평 안에서 주의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이 우리의 삶에 참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은 큰 뉴스거리이지만, 그것은 나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국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정상적 사회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는가 하는 것은 자신의 작은 삶의 문제에 쫓기면서 나날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그렇게 중요한 사안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지난번 미국 대통령 선거 때 뉴욕타임스는 미국 각 지역의 사람들을 상대로 관심 정도를 조사하여 보도한 바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정과 동네와 직장의 작은 문제들에 마음을 두고 있어서, 그것과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 사이에는 별 관계가 없다고 느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큰 지평 안에서 일어나는 큰일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것을 자신이 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큰일을 다루는 사람들이 그것을 삶의 작은 것들에 이어지도록 노력할 때 그것이 가능하다. 물론 여기에는 보통 사람들의 관심이 뒷받침돼야 한다. 큰 것과 작은 것의 연결이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이,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민주주의다. 선동적 대중정치는 보통 사람의 관심까지도 큰 정치 문제에만 집중시키고자 한다.
큰 테두리의 문제이면서 보통 사람의 좁은 관점에서도 직접적인 중요성을 가진 것은 경제위기다. 지난 3월24일 독일 베를린에서는 경제 위기의 향방을 전망하는 호르스트 쾰러 대통령의 연설이 있었다. 이 연설은 상당한 화제가 되었다. 대통령의 연설이 자주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를 지냈던 경제계 출신의 정치인이 금융 규제와 감독 그리고 그 사회적 기능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 것은 ‘정치의 우위’와 그것을 정당화하는 사회윤리철학이었다.
금융회사 구조를 위한 국가예산 지출은 당연한 것이지만, 이제는 금융과 경제가 옛날로 돌아가지 않고 새 길을 가야 한다고 쾰러 대통령은 말했다. 은행가들의 거액 보수, 투자 손실, 줄어드는 직장, 정부의 구조 비용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시장체제에 대하여 회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민주주의 자체가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금융회사들의 잘못은 현실 경제, 그리고 사회적 삶을 이탈하여 자기들만의 단기 이익을 추구했던 데 있다. 금융질서는 국가의 조정을 통해서만 유지된다. 그것은 자체 조정의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금융의 지속적인 가치창조는 그것이 사회 전체의 한 부분이고 사회적 담지력의 범위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할 때에만 가능하다. 소유는 의무를 수반한다. 그것은 사회 전체의 안녕에 기여할 수 있도록 사용되어야 한다.
쾰러 대통령의 연설은 이 연장선상에서 경제 일반, 정치, 그리고 그것들의 사회적 의미를 상기시킨다. 시장경제는 투명성, 정직성, 그리고 신뢰가 없는 곳에 제대로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은 국가의 규제를 통해서만 확보된다. 자유가 중요한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규범과 도덕이 없이는 자멸하게 되어 있다. 자유는 강한 사람의 권리도 아니고 자기만의 좋은 자리를 보장하는 특권도 아니다. 기회의 공유, 이웃과 전체의 안녕에 대한 책임감-이러한 것과의 관계에서만 자유는 가치 있는 것이 된다.
경제성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복지와 환경의 제한 조건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 과학과 기술은 새로운 환경 산업혁명을 가져 올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지식과 지혜 그리고 문화 발전은 좋은 삶의 핵심이다. 노동의 가치와 위엄은 새롭게 발견될 필요가 있다. 노동은 생산 이외에 인간의 상호유대를 강화하는 기회가 된다.
이러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목표들이 독일에만 한정되어 추구될 수는 없다. 지구화는 오늘날 부정될 수 없는 현실이다. 사람들 사이에는 더 많은 소통이 있어야 하고, ‘전지구적인 유대’의 확인이 있어야 한다. 세계적으로도 자본은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삶의 진리 안통하는 현실에 난감
쾰러 대통령의 이러한 말들은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독일의 ‘사회시장’의 원리를 되새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 시점에서 그의 위치에 있는 정치인이 그것을 말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 현실성을 의심할 수는 있어도, 연설에 담긴 선의의 지침들에 반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앞에 말한 큰 뉴스들과 관련하여, 정치가 경제를 바로잡고 윤리화하는 것이라면, 우리 정치에 만연된 부패, 도덕의 허위화, 전략주의-이러한 것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복지와 유대와 국제적 협조가 앞으로의 ‘인류적 과제’라고 한다면, 그리고 힘보다는 이 점에서의 모범이 통용되는 세계가 되어야 한다면, 북한의 로켓 발사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단순한 삶의 진리가 통하지 않는 것이 요즘 세상이다. 상황 인식은 사람 따라 다를 것이다.
요즘 미국에서는 총기 난사 살인이 빈번해지고 있다. 최근에는 피스버그에서 있었던 그런 사건에서는, 범인이 구조 요청의 전화에 응하여 달려 온 경찰관 3명을 사살하고 중상을 입은 채로 체포되었다. 동기가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범인은 평소에 무기와 실탄을 수집하고 있었다. 친지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미국으로 쳐들어올지 모르는 침략군에 대비해 무기를 모으고 있었다. 그런데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무기 소유를 금지하는 법령을 만든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번의 경찰관 살해는 이에 항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한 친구의 설명이다. 고등학교에서 탈락, 해병대 불명예 제대의 이력이 있는 범인은 일자리를 전전하다가 이번 사건 조금 전에 직장을 잃고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었다. 그의 범행동기에 대한 친구의 설명이 맞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투쟁적 애국자였다. 큰 이념들의 전략 속에서 사람들의 상황 이해 그리고 행동은 예측할 수 없는 형태를 띤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자유의 가치 규범·도덕 통해 빛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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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큰 지평 안에서 일어나는 큰일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것을 자신이 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큰일을 다루는 사람들이 그것을 삶의 작은 것들에 이어지도록 노력할 때 그것이 가능하다. 물론 여기에는 보통 사람들의 관심이 뒷받침돼야 한다. 큰 것과 작은 것의 연결이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이,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민주주의다. 선동적 대중정치는 보통 사람의 관심까지도 큰 정치 문제에만 집중시키고자 한다.
큰 테두리의 문제이면서 보통 사람의 좁은 관점에서도 직접적인 중요성을 가진 것은 경제위기다. 지난 3월24일 독일 베를린에서는 경제 위기의 향방을 전망하는 호르스트 쾰러 대통령의 연설이 있었다. 이 연설은 상당한 화제가 되었다. 대통령의 연설이 자주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를 지냈던 경제계 출신의 정치인이 금융 규제와 감독 그리고 그 사회적 기능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 것은 ‘정치의 우위’와 그것을 정당화하는 사회윤리철학이었다.
금융회사 구조를 위한 국가예산 지출은 당연한 것이지만, 이제는 금융과 경제가 옛날로 돌아가지 않고 새 길을 가야 한다고 쾰러 대통령은 말했다. 은행가들의 거액 보수, 투자 손실, 줄어드는 직장, 정부의 구조 비용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시장체제에 대하여 회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민주주의 자체가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금융회사들의 잘못은 현실 경제, 그리고 사회적 삶을 이탈하여 자기들만의 단기 이익을 추구했던 데 있다. 금융질서는 국가의 조정을 통해서만 유지된다. 그것은 자체 조정의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금융의 지속적인 가치창조는 그것이 사회 전체의 한 부분이고 사회적 담지력의 범위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할 때에만 가능하다. 소유는 의무를 수반한다. 그것은 사회 전체의 안녕에 기여할 수 있도록 사용되어야 한다.
쾰러 대통령의 연설은 이 연장선상에서 경제 일반, 정치, 그리고 그것들의 사회적 의미를 상기시킨다. 시장경제는 투명성, 정직성, 그리고 신뢰가 없는 곳에 제대로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은 국가의 규제를 통해서만 확보된다. 자유가 중요한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규범과 도덕이 없이는 자멸하게 되어 있다. 자유는 강한 사람의 권리도 아니고 자기만의 좋은 자리를 보장하는 특권도 아니다. 기회의 공유, 이웃과 전체의 안녕에 대한 책임감-이러한 것과의 관계에서만 자유는 가치 있는 것이 된다.
경제성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복지와 환경의 제한 조건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 과학과 기술은 새로운 환경 산업혁명을 가져 올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지식과 지혜 그리고 문화 발전은 좋은 삶의 핵심이다. 노동의 가치와 위엄은 새롭게 발견될 필요가 있다. 노동은 생산 이외에 인간의 상호유대를 강화하는 기회가 된다.
이러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목표들이 독일에만 한정되어 추구될 수는 없다. 지구화는 오늘날 부정될 수 없는 현실이다. 사람들 사이에는 더 많은 소통이 있어야 하고, ‘전지구적인 유대’의 확인이 있어야 한다. 세계적으로도 자본은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삶의 진리 안통하는 현실에 난감
쾰러 대통령의 이러한 말들은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독일의 ‘사회시장’의 원리를 되새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 시점에서 그의 위치에 있는 정치인이 그것을 말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 현실성을 의심할 수는 있어도, 연설에 담긴 선의의 지침들에 반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앞에 말한 큰 뉴스들과 관련하여, 정치가 경제를 바로잡고 윤리화하는 것이라면, 우리 정치에 만연된 부패, 도덕의 허위화, 전략주의-이러한 것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복지와 유대와 국제적 협조가 앞으로의 ‘인류적 과제’라고 한다면, 그리고 힘보다는 이 점에서의 모범이 통용되는 세계가 되어야 한다면, 북한의 로켓 발사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단순한 삶의 진리가 통하지 않는 것이 요즘 세상이다. 상황 인식은 사람 따라 다를 것이다.
요즘 미국에서는 총기 난사 살인이 빈번해지고 있다. 최근에는 피스버그에서 있었던 그런 사건에서는, 범인이 구조 요청의 전화에 응하여 달려 온 경찰관 3명을 사살하고 중상을 입은 채로 체포되었다. 동기가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범인은 평소에 무기와 실탄을 수집하고 있었다. 친지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미국으로 쳐들어올지 모르는 침략군에 대비해 무기를 모으고 있었다. 그런데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무기 소유를 금지하는 법령을 만든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번의 경찰관 살해는 이에 항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한 친구의 설명이다. 고등학교에서 탈락, 해병대 불명예 제대의 이력이 있는 범인은 일자리를 전전하다가 이번 사건 조금 전에 직장을 잃고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었다. 그의 범행동기에 대한 친구의 설명이 맞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투쟁적 애국자였다. 큰 이념들의 전략 속에서 사람들의 상황 이해 그리고 행동은 예측할 수 없는 형태를 띤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입력 : 2009-04-08 18:08:25ㅣ수정 :
[김우창 칼럼]폭주족의 시대
입력 : 2009-04-22 18:08:43ㅣ수정 :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하향한 뒤 봉하마을에 투자된 금액이 500억원에 이른다고 한다. 이것은 공권력의 개인 특권화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에 대하여 어떤 변명은 지방 발전에 투자되는 것인데 무엇이 문제인가 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 또는 그 측근과 관련하여 500만달러가 오갔다는 보도가 연속되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액수인지 보통 사람에게는 쉽게 짐작이 되지 않지만, 별로 큰 액수도 아닌데 그 정도가 무슨 문제인가 하는 의견이 있다. 이것은, 현재 우리 정치 세계에 뒷거래로 오가는 돈의 크기에 비추어 문제될 만한 것이 될 수 없다는 느낌을 말한 것이라 할 수도 있고, 그만한 자리라면 그 정도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일 수도 있다. 또 그것은 경제 전체의 규모와 관련하여 그만한 액수가 별로 중요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냉정한 경제적 판단일 수도 있다. 보도되는 부정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상황 자체가 크게 위험에 빠지지 않는 것을 보면 대통령과 같은 최고 정치지도자의 존재 또 그의 행각이 생각하는 만큼은 중요치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돈으로 권력 늘리려는 통치자
통치자는 권력자이면서 상징적 존재인데, 전통 시대에는 그 상징성이 이미 강력한 현실적 의미가 있었다. 임금의 몸가짐이 현실에 직접적으로 마술적 힘을 행사하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임금이 성인에 가까운 존재, 성군(聖君)이 되는 것은 백성과 나라의 평안을 위하여 필수적인 일이었다. 퇴계가 어린 선조(宣祖)에게 임금의 도리를 설명하여 올린 상소문들에서도 이 이념이 강하게 주장되어 있다. 하늘이 백성을 돌보려고 하면, “신령스럽고 성스럽고 맑고, 으뜸으로 어질고 신과 인간을 조화할 사람을” 임금으로 삼아 나라 일을 돌보게 한다. 그러므로 임금은 우선 성학(聖學)을 공부하여 “물결이 일지 않는 물이나 먼지가 일지 않는 거울과 같은 인애(仁愛)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 그러나 마음이란 “쟁반에 물을 엎지르지 않는 것보다 어렵고 착함은 바람 앞의 촛불을 보전하기보다 어렵기에” 마음을 닦아도, “눈을 가리는 일이 잡다하게 앞에 닥치고 애증(愛憎)의 흔들림과 유혹됨이 아울러 일어나서, 날이 가고 달이 쌓이면서, 예사로 되고 습관으로 되면, (그것을) 잘 알지 못하게 된다”. 나라에 환란이 이는 것은 임금이 태만하고 경솔하기 때문이다. 임금이 자기를 탐닉하는 상태에 빠지면, “두려운 마음이 날로 풀리고 사악하고 편벽된 정이 날로 방종하게 되어 마치 물의 제방을 터놓은 것 같이 된다”. 백성들이 재해와 변고를 당하게 되는 것은 이로 인한 것이다. 특히 상황이 “몸을 멸하고 나라를 망치는 지경에 이르는 것은, 임금이 사(私)라는 글자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임금이라는 자리는 “털끝만큼도 속임수가 용납되지 않는” 어렵고도 어려운 자리이다.
성군(聖君)의 이상은 지나치게 엄숙한 것이어서 임금도 인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성군의 도덕 정치는 적지아니 억압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도덕 정치가 늘 현실적 효력을 갖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특히, “남쪽을 바로 보면서 앉아 있기만 하여도” 천하가 바로 움직이게 되던 요순시대와는 달리, 많은 것을 현실적인 힘-강제력과 전략과 돈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 오늘의 정치이다. 그런데 마키아벨리적인 힘과 사술(詐術)이 정치의 전부라고 하는 것은 또 다른 면에서 인간현실의 전부를 이해하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되어 가고 있는 것이 우리 정치이다.
민주주의는 신령스러운 권위에 의존함이 없이 정치의 공공성을 제도적이고 법적인 절차로서 확보하려는 정치 체제이다. 거기에서는 모두가 보통 사람이다. 그래도 지도자가 있어야 하고 그 권위는 사회와 정치 질서의 지주가 아니 될 수가 없다. 이 권위는 권력의 독점과 현실적 실행력의 소산이면서 사회윤리적 차원을 갖는다. 자신은 그렇지 못한 경우라도 사람들은 “물결이 일지 않는 물이나 먼지가 일지 않는 거울과 같은” 기준이 현실의 어디엔가 존재하고, 공공질서가 그것을 나타낼 수 있다고 믿는다. 공직에 나아가는 사람은 그 이상을 내면화하고 사사로운 마음과 몸가짐의 편안함을 버려야 한다. 그것이 그에게 보람을 가져오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마술적 힘을 발휘한다. 쉽게 잡아 내어 말할 수는 없으면서도, 도덕적 윤리적 권위는 사회와 정치를 위한 정신적 사회 자산이 된다. 이것을 거의 바닥내고 없앤 것이 우리 사회가 아닌가 한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적 행동의 전략화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나날의 삶에서도 전략의 종횡가(縱橫家)가 되어 가고 있다. 사회에 도덕적 명분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전략화되는 명분이 바로 자산의 탕진에 기여한다. 여기에 크게 작용한 것이 지난 몇 대에 걸친 대통령들의 행태이다.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면, 이것이야말로 위기의 요인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최근 흥미로운 뉴스의 하나는 한밤중에 인천공항을 비롯한 고속도로에 모여 단거리 자동차 경주를 벌이는 야반 폭주족들의 이야기이다. 최고 속도 355㎞까지 달리는 폭주족의 스포츠카는 가격이 대당 10억원에서 17억원이라고 한다. 이러한 경주의 쾌감은 담력과 자긍심을 충족시키는 것일 터인데, 물론 거기에는 금력과 사회적 지위의 과시가 크게 작용할 것이다. 폭주족은 우리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어떤 심리적 경향을 극단화하여 표현해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서는 그것이 폭력에 가까운 형태로 표현되어 있기는 하지만, 권력과 자만심과 금력-우리 사회의 많은 일들은 이것을 향한 폭주라는 인상을 준다. 정치도 그러한 폭주의 한 형태가 되어 간다.
돈으로 지위 과시 폭주족 닮아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말이 있지만,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권력의 기한은 더 짧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것을 다른 형태로나마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돈이다. 공직자들의 수입을 최근의 경제 위기와 관련하여 논의된 경제계, 재개의 보수 규모에 비해 보면, 그들이 어떤 수단을 통해서든지 재산을 확보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게 되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17억원짜리 스포츠카를 생각하면, 500만달러는 큰 돈이 아니다.
플라톤의 공화국에서 어떤 사람들은 진선미의 추구에서 너무나 큰 보람을 느끼게 되기 때문에 정치에 나아가기를 즐거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공동체적 의무감에서 정치를 맡게 될 때, 보람은 정의와 선과 조화가 있는 사회를 위하여 봉사하는 데에서 온다. 그들은 권력과 금력에는 관심이 없다. 사회가 온전하게 기능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분야의 일들이 유기적으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사람들은 스스로 선택하고 사회가 필요로 하는, 서로 다른 여러 일에서 보람을 느낀다. 아마 정부 관리들의 봉급이 재계의 보수에 절대적으로 미치지 못하게 책정된 것은 그 보상이 반드시 돈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도덕적 이상을 포함하여 여러 부분에서 삶의 보람을 추구하는 것도 대체로 부귀에로 나아가는 우회로가 되었다. 모든 길은 권력과 금력과 자만심으로 통한다. 그런데 물결이 일지 않는 물이나 먼지가 일지 않는 거울과 같은 인애(仁愛)의 마음은 아니라도 적어도 흔들리지 않고 맑은 도덕적 엄격성을 지도층에서 기대할 수 없는 사회가 얼마나 오래 온전할 수 있는 것일까?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돈으로 권력 늘리려는 통치자
통치자는 권력자이면서 상징적 존재인데, 전통 시대에는 그 상징성이 이미 강력한 현실적 의미가 있었다. 임금의 몸가짐이 현실에 직접적으로 마술적 힘을 행사하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임금이 성인에 가까운 존재, 성군(聖君)이 되는 것은 백성과 나라의 평안을 위하여 필수적인 일이었다. 퇴계가 어린 선조(宣祖)에게 임금의 도리를 설명하여 올린 상소문들에서도 이 이념이 강하게 주장되어 있다. 하늘이 백성을 돌보려고 하면, “신령스럽고 성스럽고 맑고, 으뜸으로 어질고 신과 인간을 조화할 사람을” 임금으로 삼아 나라 일을 돌보게 한다. 그러므로 임금은 우선 성학(聖學)을 공부하여 “물결이 일지 않는 물이나 먼지가 일지 않는 거울과 같은 인애(仁愛)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 그러나 마음이란 “쟁반에 물을 엎지르지 않는 것보다 어렵고 착함은 바람 앞의 촛불을 보전하기보다 어렵기에” 마음을 닦아도, “눈을 가리는 일이 잡다하게 앞에 닥치고 애증(愛憎)의 흔들림과 유혹됨이 아울러 일어나서, 날이 가고 달이 쌓이면서, 예사로 되고 습관으로 되면, (그것을) 잘 알지 못하게 된다”. 나라에 환란이 이는 것은 임금이 태만하고 경솔하기 때문이다. 임금이 자기를 탐닉하는 상태에 빠지면, “두려운 마음이 날로 풀리고 사악하고 편벽된 정이 날로 방종하게 되어 마치 물의 제방을 터놓은 것 같이 된다”. 백성들이 재해와 변고를 당하게 되는 것은 이로 인한 것이다. 특히 상황이 “몸을 멸하고 나라를 망치는 지경에 이르는 것은, 임금이 사(私)라는 글자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임금이라는 자리는 “털끝만큼도 속임수가 용납되지 않는” 어렵고도 어려운 자리이다.
성군(聖君)의 이상은 지나치게 엄숙한 것이어서 임금도 인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성군의 도덕 정치는 적지아니 억압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도덕 정치가 늘 현실적 효력을 갖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특히, “남쪽을 바로 보면서 앉아 있기만 하여도” 천하가 바로 움직이게 되던 요순시대와는 달리, 많은 것을 현실적인 힘-강제력과 전략과 돈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 오늘의 정치이다. 그런데 마키아벨리적인 힘과 사술(詐術)이 정치의 전부라고 하는 것은 또 다른 면에서 인간현실의 전부를 이해하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되어 가고 있는 것이 우리 정치이다.
민주주의는 신령스러운 권위에 의존함이 없이 정치의 공공성을 제도적이고 법적인 절차로서 확보하려는 정치 체제이다. 거기에서는 모두가 보통 사람이다. 그래도 지도자가 있어야 하고 그 권위는 사회와 정치 질서의 지주가 아니 될 수가 없다. 이 권위는 권력의 독점과 현실적 실행력의 소산이면서 사회윤리적 차원을 갖는다. 자신은 그렇지 못한 경우라도 사람들은 “물결이 일지 않는 물이나 먼지가 일지 않는 거울과 같은” 기준이 현실의 어디엔가 존재하고, 공공질서가 그것을 나타낼 수 있다고 믿는다. 공직에 나아가는 사람은 그 이상을 내면화하고 사사로운 마음과 몸가짐의 편안함을 버려야 한다. 그것이 그에게 보람을 가져오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마술적 힘을 발휘한다. 쉽게 잡아 내어 말할 수는 없으면서도, 도덕적 윤리적 권위는 사회와 정치를 위한 정신적 사회 자산이 된다. 이것을 거의 바닥내고 없앤 것이 우리 사회가 아닌가 한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적 행동의 전략화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나날의 삶에서도 전략의 종횡가(縱橫家)가 되어 가고 있다. 사회에 도덕적 명분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전략화되는 명분이 바로 자산의 탕진에 기여한다. 여기에 크게 작용한 것이 지난 몇 대에 걸친 대통령들의 행태이다.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면, 이것이야말로 위기의 요인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최근 흥미로운 뉴스의 하나는 한밤중에 인천공항을 비롯한 고속도로에 모여 단거리 자동차 경주를 벌이는 야반 폭주족들의 이야기이다. 최고 속도 355㎞까지 달리는 폭주족의 스포츠카는 가격이 대당 10억원에서 17억원이라고 한다. 이러한 경주의 쾌감은 담력과 자긍심을 충족시키는 것일 터인데, 물론 거기에는 금력과 사회적 지위의 과시가 크게 작용할 것이다. 폭주족은 우리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어떤 심리적 경향을 극단화하여 표현해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서는 그것이 폭력에 가까운 형태로 표현되어 있기는 하지만, 권력과 자만심과 금력-우리 사회의 많은 일들은 이것을 향한 폭주라는 인상을 준다. 정치도 그러한 폭주의 한 형태가 되어 간다.
돈으로 지위 과시 폭주족 닮아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말이 있지만,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권력의 기한은 더 짧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것을 다른 형태로나마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돈이다. 공직자들의 수입을 최근의 경제 위기와 관련하여 논의된 경제계, 재개의 보수 규모에 비해 보면, 그들이 어떤 수단을 통해서든지 재산을 확보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게 되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17억원짜리 스포츠카를 생각하면, 500만달러는 큰 돈이 아니다.
플라톤의 공화국에서 어떤 사람들은 진선미의 추구에서 너무나 큰 보람을 느끼게 되기 때문에 정치에 나아가기를 즐거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공동체적 의무감에서 정치를 맡게 될 때, 보람은 정의와 선과 조화가 있는 사회를 위하여 봉사하는 데에서 온다. 그들은 권력과 금력에는 관심이 없다. 사회가 온전하게 기능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분야의 일들이 유기적으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사람들은 스스로 선택하고 사회가 필요로 하는, 서로 다른 여러 일에서 보람을 느낀다. 아마 정부 관리들의 봉급이 재계의 보수에 절대적으로 미치지 못하게 책정된 것은 그 보상이 반드시 돈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도덕적 이상을 포함하여 여러 부분에서 삶의 보람을 추구하는 것도 대체로 부귀에로 나아가는 우회로가 되었다. 모든 길은 권력과 금력과 자만심으로 통한다. 그런데 물결이 일지 않는 물이나 먼지가 일지 않는 거울과 같은 인애(仁愛)의 마음은 아니라도 적어도 흔들리지 않고 맑은 도덕적 엄격성을 지도층에서 기대할 수 없는 사회가 얼마나 오래 온전할 수 있는 것일까?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입력 : 2009-04-22 18:08:43ㅣ수정 :
[김우창칼럼]부패와 도덕성
입력 : 2009-05-06 18:07:36ㅣ수정 :
지도상으로 결코 큰 나라라고 할 수 없는 한국이 경제력에서 세계 13위라는 말을 들으면, 경제 지표의 단순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사람도 놀라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부패지수라는 또 다른 숫자를 보면, 세계적으로 한국의 순위는 지난 10년간 계속 130여 개국 가운데 40위를 넘어서지 못한다.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은 단순히 경제력만이 아니라 이러한 도덕성의 지표에서도 다른 나라들보다 앞서 있다. 선진국이 된다는 것은, 이것도 문제적인 용어이지만,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부러움의 표적이다. 이에 이르는 자격 요건의 하나는 부패의 수렁에서 벗어 나오는 것이다. 사실 부패의 극복은 부질없는 허영심 때문이 아니라 사람 사는 사회를 건설해 나가는 데에 필수 사항이다. (그것은 국가와 기업의 효율성의 기본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도 안정된 삶의 기본이다. 부패된 사회의 전략과 술책 속에서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면서 살아야 하는 인생은 얼마나 낭비적인 것인가?) 우리의 큰 불행은 이 점에서 국민의 사표가 될 수도 있었을 대통령들까지도 부패의 수렁을 깊이 하는 데에 기여한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여러 대통령이 그러한 것을 보면,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고질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는지 모른다.
경제력에 못미치는 부패지수
근본 문제는 이권과 정권의 착잡한 연계 관계라고 할 것인데, 이번의 경제 위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시장의 자유는 탐욕의 자유로 전락하고 삶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일이 될 수 있다. 이것을 사회적 공준(公準)에 의하여 조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이 정치이다. 그러나 깨끗하지 못한 정치가 조정 기능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경제의 정치에 의한 규제야말로 이권이 들어서는 틈새가 된다. 규제 철폐에 대한 요구가 나오는 이유의 하나는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규제 철폐는 방금 말한 것처럼 또 다른 부패를 가져오는 악순환의 한 고리가 된다.)
깨끗한 정치는 어떻게 가능한가? 어떤 정치이론은 민주주의의 상호 견제와 균형이 한 방법이라고 한다. 균형 또는 상호 긴장을 유지할 수 있다면, 도둑들도 서로 견제하여 일정한 질서를 유지할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처방에서만이 아니라, 현대 정치이론은 물질과 제도로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음의 정향을 빼고도 투명한 정치질서가 가능한 것일까? 견제와 균형은, 공동 가치의 기반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원칙으로 정립하는 제도적 장치라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닐까? 청렴도에서 선두에 서는 스칸디나비아 여러 나라들 또는 다른 선진 제국이 제도만으로 그러한 투명성을 이룩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스칸디나비아 여러 나라들은 서구에서도 도덕주의의 목소리기 가장 낮은 사회라고 일컬어 진다. 그러나 전통적 관점에서 본 성풍습과 같은 개인 도덕은 몰라도 공중 장소나 정치적 공공 공간에서의 염격한 질서는 이 나라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도덕주의 소리가 낮은 것은, 노자의 비유를 빌려, 물속에 사는 물고기가 물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 사회에서 도덕적 수사의 소리가 높은 것은 우리가 물을 잃어버린 물고기와 같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수없는 수난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완전히 무법천지 또는 마피아의 세계로 떨어지지 않은 것은 그 나름으로 이러한 도덕적 수사가 완전히 공허한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경제 지표에 미치지 못하는 부패지수는 이 도덕성의 수사에 어떤 근본적 하자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독직의 혐의를 받게 되는 정치지도자나 고위 공직자의 경우, 그들도 도덕성의 소리를 높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흔히 듣는 도덕성의 목소리는 다른 사람들을 꾸짖는 소리일 수는 있지만, 자신의 행동을 기율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밖으로 향하는 것이지 안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다. 그 자체의 가치라기보다는 밖을 향하는 투쟁의 수단인 것이다.
우리에게는 도덕성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정의이다. 정의는 분노의 느낌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분노로서의 정의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이 침해될 때 가장 강하게 느껴진다. 그중에도 나의 존엄성이 훼손될 때에 어성이 더욱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의 존엄성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기본적인 인간적 위엄을 말할 수도 있지만, 나의 신분과 지위에 맞는 물질적 향유와 사회적 위세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인정받고 모심받는 것을 내 존재의 의미로 생각하는 사회에서 특히 그러하다. 도덕성은 이것을 위한 투쟁의 수단이고 또 과시와 인정의 요건이다.
그러나 도덕적 가치는 인간의 정신적 존재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것은 나의 삶의 지침이고 삶의 의미이다. 물론 가장 바람직한 것은 그것이 고기를 헤엄칠 수 있게 하는 물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 그것은 자기실현의 가치로서 밝혀질 필요가 있다. 사회적 인정도 이러한 관련에서 더 높은 존재의 차원에 이르는 하나의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예로부터 제 몸과 마음을 닦는 것은 사회에 나아가는 일이면서 형이상학적 세계에서 자신의 참 모습을 되찾는 일이다. 극기복례(克己復禮)-자기를 이기고 예로 나간다는 말은 밖에서 주어지는 규범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규범이 자신의 본질이라는 것을 아는 과정을 말한다.
도덕성까지 겸비해야 선진국
1950년대 말에 나온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로베레 장군>이라는 영화는 더욱 경험적인 차원에서 비슷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나치 지배하의 제노아에서, 사기꾼 그리말디는 나치에 체포되어 레지스탕스의 일꾼들이 수감되어있는 감옥에 투옥된다. 그는 게슈타포의 지시에 따라 저항운동의 지도자 로베레 장군을 사칭한다. 그 대신 그에게는 얻어내는 정보에 대하여 보상이 약속되어 있다. 가짜 로베레 장군 그리말디는 동료 복역수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는다. 그런데 신뢰와 존경을 얻는 과정에서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그리하여 그는 참으로 로베레 장군처럼 행동하고 스스로 로베레 장군이라는 것을 주장하며 게슈타포와의 협조를 거부하고 총살된다.
사회가 부여하는 공적인 임무는 반드시 이와 같은 자기변용과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 경우에도 인간의 사회적 존재 속에 숨어 있는 인간 실존의 다른 차원을 드러내어 보여줄 수 있다. 공적인 책임에 따르는 보상이 반드시 세속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면서도 세속적일 수밖에 없는 근대적 사회가 인간적 질서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은 다소간에 이러한 더 높은 차원의 진실이 사회 어디엔가-또는 사회의 책임있는 자리에-존재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지나치게 외면화된 도덕성은 사회에 대하여 독단적 자기주장 그리고 세속적 인정과 보상에 대한 요구가 될 수 있다. 그것은 사회적 전략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가지게 된다. 경쟁 사회에서 인정을 위한 전략과 목표는 여러 형태의 과시적 외화(外華)를 포함한다. 그런데 부패는 이 외화를 획득하는 더 간단한 다른 방법이다. 물론 이것은 도덕적 명분과 양립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도덕성과 함께 사회적 투쟁 전략의 일부라는 점에서 완전히 범주를 달리 하는 것은 아니다. 둘 사이에 혼란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럽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경제력에 못미치는 부패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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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정치는 어떻게 가능한가? 어떤 정치이론은 민주주의의 상호 견제와 균형이 한 방법이라고 한다. 균형 또는 상호 긴장을 유지할 수 있다면, 도둑들도 서로 견제하여 일정한 질서를 유지할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처방에서만이 아니라, 현대 정치이론은 물질과 제도로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음의 정향을 빼고도 투명한 정치질서가 가능한 것일까? 견제와 균형은, 공동 가치의 기반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원칙으로 정립하는 제도적 장치라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닐까? 청렴도에서 선두에 서는 스칸디나비아 여러 나라들 또는 다른 선진 제국이 제도만으로 그러한 투명성을 이룩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스칸디나비아 여러 나라들은 서구에서도 도덕주의의 목소리기 가장 낮은 사회라고 일컬어 진다. 그러나 전통적 관점에서 본 성풍습과 같은 개인 도덕은 몰라도 공중 장소나 정치적 공공 공간에서의 염격한 질서는 이 나라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도덕주의 소리가 낮은 것은, 노자의 비유를 빌려, 물속에 사는 물고기가 물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 사회에서 도덕적 수사의 소리가 높은 것은 우리가 물을 잃어버린 물고기와 같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수없는 수난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완전히 무법천지 또는 마피아의 세계로 떨어지지 않은 것은 그 나름으로 이러한 도덕적 수사가 완전히 공허한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경제 지표에 미치지 못하는 부패지수는 이 도덕성의 수사에 어떤 근본적 하자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독직의 혐의를 받게 되는 정치지도자나 고위 공직자의 경우, 그들도 도덕성의 소리를 높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흔히 듣는 도덕성의 목소리는 다른 사람들을 꾸짖는 소리일 수는 있지만, 자신의 행동을 기율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밖으로 향하는 것이지 안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다. 그 자체의 가치라기보다는 밖을 향하는 투쟁의 수단인 것이다.
우리에게는 도덕성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정의이다. 정의는 분노의 느낌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분노로서의 정의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이 침해될 때 가장 강하게 느껴진다. 그중에도 나의 존엄성이 훼손될 때에 어성이 더욱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의 존엄성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기본적인 인간적 위엄을 말할 수도 있지만, 나의 신분과 지위에 맞는 물질적 향유와 사회적 위세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인정받고 모심받는 것을 내 존재의 의미로 생각하는 사회에서 특히 그러하다. 도덕성은 이것을 위한 투쟁의 수단이고 또 과시와 인정의 요건이다.
그러나 도덕적 가치는 인간의 정신적 존재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것은 나의 삶의 지침이고 삶의 의미이다. 물론 가장 바람직한 것은 그것이 고기를 헤엄칠 수 있게 하는 물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 그것은 자기실현의 가치로서 밝혀질 필요가 있다. 사회적 인정도 이러한 관련에서 더 높은 존재의 차원에 이르는 하나의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예로부터 제 몸과 마음을 닦는 것은 사회에 나아가는 일이면서 형이상학적 세계에서 자신의 참 모습을 되찾는 일이다. 극기복례(克己復禮)-자기를 이기고 예로 나간다는 말은 밖에서 주어지는 규범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규범이 자신의 본질이라는 것을 아는 과정을 말한다.
도덕성까지 겸비해야 선진국
1950년대 말에 나온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로베레 장군>이라는 영화는 더욱 경험적인 차원에서 비슷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나치 지배하의 제노아에서, 사기꾼 그리말디는 나치에 체포되어 레지스탕스의 일꾼들이 수감되어있는 감옥에 투옥된다. 그는 게슈타포의 지시에 따라 저항운동의 지도자 로베레 장군을 사칭한다. 그 대신 그에게는 얻어내는 정보에 대하여 보상이 약속되어 있다. 가짜 로베레 장군 그리말디는 동료 복역수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는다. 그런데 신뢰와 존경을 얻는 과정에서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그리하여 그는 참으로 로베레 장군처럼 행동하고 스스로 로베레 장군이라는 것을 주장하며 게슈타포와의 협조를 거부하고 총살된다.
사회가 부여하는 공적인 임무는 반드시 이와 같은 자기변용과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 경우에도 인간의 사회적 존재 속에 숨어 있는 인간 실존의 다른 차원을 드러내어 보여줄 수 있다. 공적인 책임에 따르는 보상이 반드시 세속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면서도 세속적일 수밖에 없는 근대적 사회가 인간적 질서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은 다소간에 이러한 더 높은 차원의 진실이 사회 어디엔가-또는 사회의 책임있는 자리에-존재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지나치게 외면화된 도덕성은 사회에 대하여 독단적 자기주장 그리고 세속적 인정과 보상에 대한 요구가 될 수 있다. 그것은 사회적 전략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가지게 된다. 경쟁 사회에서 인정을 위한 전략과 목표는 여러 형태의 과시적 외화(外華)를 포함한다. 그런데 부패는 이 외화를 획득하는 더 간단한 다른 방법이다. 물론 이것은 도덕적 명분과 양립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도덕성과 함께 사회적 투쟁 전략의 일부라는 점에서 완전히 범주를 달리 하는 것은 아니다. 둘 사이에 혼란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럽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입력 : 2009-05-06 18:07:36ㅣ수정 :
[김우창칼럼]열린 사회, 닫힌 사회
입력 : 2009-05-20 18:12:18ㅣ수정 :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국가 간의 세력 관계가 새로 조정되는 가운데, 중국이나 인도와 같은 나라가 경제력뿐만 아니라 여러 면에서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역사의 긴 안목을 강조하는 어떤 관점에서는 이것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 그 전의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근대 이전에 이 나라들은 세계의 중심 국가였는데, 이제 다시 그 전의 위치로 돌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비슷한 세력 균형이 재현된다고 해도 엄청나게 달라진 여건 아래에서 똑같은 것이 반복된다는 말은 아니다.
영국 해군 장교 출신의 저술가 개빈 멘지스는, 2002년에 출간된 <1421년,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라는 책에서, 명나라 장수 정화(鄭和)가 이끄는 배가 콜럼버스 이전에 아프리카에 다다랐고 마젤란 이전에 세계를 일주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곳곳에 기착했다고 주장해 센세이션이 된 일이 있었다. 이 주장을 그대로 수긍하는 사학자들은 많지 않지만, 1433년을 기점으로 하여 명조의 대외 정책이 급전하게 될 때까지 중국이 해양 무역 국가로서 크게 번창했던 것은 확실하다. 미국의 지리견문 잡지 ‘내셔널 지오그라픽’지의 최근호는, 자바 해에서 1998년에 발견된 9세기의 아랍 무역선의 잔해에 대한 보고를 싣고 있다. 이것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옛 해양 무역의 모습을 넘겨 볼 수 있게 한다.
明代 폐쇄주의 이후 중국 낙후
이 난파선에서 발견된 물품의 수는 6만점에 이른다. 그중에 중요한 것은 접시, 사발, 물병 등 5만5000점의 금은기 그리고 도기이다. 도기는 대체로 후난성(湖南省)의 여러 가마에서 만들어진 장사(長沙) 사발이다. 일관된 규격으로 양산되었던 이 물품들은 일정한 산업 조직이 발달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러한 물품을 거래하던 무역은 동으로 당(唐) 제국과 서로 스페인, 이라크 그리고 페르시아를 포함하는 이슬람 제국(帝國) 사이에 이루어지던 것이었다. 이 무렵 중국의 광저우(廣州)와 이라크의 바스라 사이의 항로는 무역의 해상 실크로드였다. 인적 교류도 활발하여, 당의 수도 장안에는 많은 외래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정화도 그 선조는 중앙아시아에서 온 회교도였다. 이 무렵 광저우에 거주하는 외국인 수는 1만명이 넘었다. 이들의 존재는 도자기 등에 새겨진 인물 초상 등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내셔널 지오그라픽의 기사에 의하면, 자바 해의 난파선의 선원 20명은 아랍인, 인도인, 말레이인이었고 선장은 아랍인이거나 페르시아인이었는데, 발견된 소지품들로 미루어 중국인 상인도 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당대(唐代)로부터 명대(明代) 초까지,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는 세력은 중국이었고, 그후에도 그것이 계속되거나 확장될 것 같았지만, 15세기 초엽 명은 정화의 지휘하에서 317척에 이르렀던 해양 함대를 불사르고 해양진출의 정책을 역전시켰다. 북쪽으로 몽고족과의 격화된 갈등도 그 원인이었지만, 상공업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던 유교 이데올로기가 확립된 것이 큰 원인이었다. 해양 진출이나 상공업보다는 대륙의 내정에 치중하게 된 명의 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든, 정책의 전환은 중국 역사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중국이 바다를 포기한 후 바다는 포르투갈, 스페인, 화란, 영국 등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된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중국이 외부와의 접촉을 최소화하고 스스로를 중화주의 속에 폐쇄하게 된 것이다. 중국이 바다에 등을 돌릴 무렵부터 서구에서는 바야흐로 근대적 과학과 기술이 태동하여 산업혁명 그리고 제국주의적 팽창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중국은 그러한 세계사의 움직임에서 국외자가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어떤 학자들은, 세계사의 근대적 전환에서 중국이 낙후된 국가가 되고 19세기 이후 근대화의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된 원인의 단초를 15세기에 있었던 역사적 방향의 전환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민생안정이라는 관점에서 한 나라의 정책이 대외 지향, 또는 대내 지향 어느 쪽이어야 하는가는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기술과 문명의 세계적 발전으로부터 고립하여 한 사회가 스스로를 제대로 보전하기 어려운 것이 국제관계의 현실이다. 이것은 세계가 좁아져 가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내재적 관점에서의 평가를 떠나서, 세계에 대하여 스스로 문을 닫고 있는 나라, 버마(미얀마)나 북한의 상황도 이러한 국제적 연관 속에서 생각될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지금의 세계에서 바깥세상으로 열려 있지 못한 나라 가운데 하나가 쿠바이다. 그 중요 원인은 반세기에 걸친 미국의 봉쇄 정책인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집권과 함께 미국은 쿠바에 대하여 유연한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카스트로 전 총리가 크게 환영의 뜻을 표명한 것은 쿠바 자체가 고립으로 인하여 생기는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랫동안 쿠바는 그 나름대로 사회주의적 이상을 충실하게 실천해온 것으로 이야기되곤 했다. 쿠바에 굶는 사람은 없다. 또 쿠바는 교육, 의료, 고용 등 사회의 기본적 복지 제도가 공평하게 운영되고 있는 나라로 알려졌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의 상투적 인상과는 달리 영화관이나 극장이 번창하고, 보통 사람들이 오페라 공연을 즐긴다.
열려 있으면서도 자유 있어야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 세계 시장에 개방됨으로써 쿠바가 얻게 될 것은 허황된 소비주의 문화와 그에 이어져 있는 불평등과 사회 갈등일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적대적이라 할 수 없는 영국 가디언지의 최근 보도에 의하면, 쿠바 사람들이 기아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삶의 조건은 최소한도를 넘어서지 못한다. 먹는 것은 최소한의 전분과 지방에 한정되고, 휴지가 없고 비누가 없다. 쿠바 사람들은 채소, 과일, 고기, 비누, 휴지, 구두, 의류 등의 일상 용품에 더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기를 원한다. 하루의 임금은 토마토 몇 개, 양파 몇 개 정도를 살 수 있는 80센트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직장 밖에서 가외의 일감을 찾아야 한다. “나라가 제공하는 직장에서는 임금을 지급하는 체하고 우리도 일을 하는 체 할 뿐”이라고 한 쿠바인의 말을 가디언은 인용하고 있다.
쿠바의 고립은 미국의 봉쇄정책이 원인이다. 그러나 그에 관계없이 중요한 사실은 오늘의 세계에서 한 국가만의 자급자족 경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쿠바가 새로운 열림의 관계를 원한다고 하여, 적어도 지금의 시점에서는, 자본주의의 모든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다. 가디언이 인용하고 있는 한 쿠바인은 “아무도 완전히 자본주의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혁명의 좋은 소득을 보존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회주의적 폐쇄성에 얽매이지 않는 사회들도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서 비슷한 문제에 부딪힌다고 할 수 있다. 시장은-특히 공동체의 테두리를 벗어나 세계화된 시장은 목적과 가치가 부재하는 수단의 공간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자유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 수단을 의미있는 수단이 되게 할 목적과 가치는 다른 곳에서 올 수밖에 없다. 열려 있으면서 또 자유를 잃지 않으면서 어떻게 고유한 인간 가치를 보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지금의 세계에서 모든 사회의 문제이다.
<김우창|고려대 명예교수>
영국 해군 장교 출신의 저술가 개빈 멘지스는, 2002년에 출간된 <1421년,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라는 책에서, 명나라 장수 정화(鄭和)가 이끄는 배가 콜럼버스 이전에 아프리카에 다다랐고 마젤란 이전에 세계를 일주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곳곳에 기착했다고 주장해 센세이션이 된 일이 있었다. 이 주장을 그대로 수긍하는 사학자들은 많지 않지만, 1433년을 기점으로 하여 명조의 대외 정책이 급전하게 될 때까지 중국이 해양 무역 국가로서 크게 번창했던 것은 확실하다. 미국의 지리견문 잡지 ‘내셔널 지오그라픽’지의 최근호는, 자바 해에서 1998년에 발견된 9세기의 아랍 무역선의 잔해에 대한 보고를 싣고 있다. 이것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옛 해양 무역의 모습을 넘겨 볼 수 있게 한다.
明代 폐쇄주의 이후 중국 낙후
이 난파선에서 발견된 물품의 수는 6만점에 이른다. 그중에 중요한 것은 접시, 사발, 물병 등 5만5000점의 금은기 그리고 도기이다. 도기는 대체로 후난성(湖南省)의 여러 가마에서 만들어진 장사(長沙) 사발이다. 일관된 규격으로 양산되었던 이 물품들은 일정한 산업 조직이 발달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러한 물품을 거래하던 무역은 동으로 당(唐) 제국과 서로 스페인, 이라크 그리고 페르시아를 포함하는 이슬람 제국(帝國) 사이에 이루어지던 것이었다. 이 무렵 중국의 광저우(廣州)와 이라크의 바스라 사이의 항로는 무역의 해상 실크로드였다. 인적 교류도 활발하여, 당의 수도 장안에는 많은 외래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정화도 그 선조는 중앙아시아에서 온 회교도였다. 이 무렵 광저우에 거주하는 외국인 수는 1만명이 넘었다. 이들의 존재는 도자기 등에 새겨진 인물 초상 등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내셔널 지오그라픽의 기사에 의하면, 자바 해의 난파선의 선원 20명은 아랍인, 인도인, 말레이인이었고 선장은 아랍인이거나 페르시아인이었는데, 발견된 소지품들로 미루어 중국인 상인도 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당대(唐代)로부터 명대(明代) 초까지,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는 세력은 중국이었고, 그후에도 그것이 계속되거나 확장될 것 같았지만, 15세기 초엽 명은 정화의 지휘하에서 317척에 이르렀던 해양 함대를 불사르고 해양진출의 정책을 역전시켰다. 북쪽으로 몽고족과의 격화된 갈등도 그 원인이었지만, 상공업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던 유교 이데올로기가 확립된 것이 큰 원인이었다. 해양 진출이나 상공업보다는 대륙의 내정에 치중하게 된 명의 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든, 정책의 전환은 중국 역사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중국이 바다를 포기한 후 바다는 포르투갈, 스페인, 화란, 영국 등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된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중국이 외부와의 접촉을 최소화하고 스스로를 중화주의 속에 폐쇄하게 된 것이다. 중국이 바다에 등을 돌릴 무렵부터 서구에서는 바야흐로 근대적 과학과 기술이 태동하여 산업혁명 그리고 제국주의적 팽창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중국은 그러한 세계사의 움직임에서 국외자가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어떤 학자들은, 세계사의 근대적 전환에서 중국이 낙후된 국가가 되고 19세기 이후 근대화의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된 원인의 단초를 15세기에 있었던 역사적 방향의 전환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민생안정이라는 관점에서 한 나라의 정책이 대외 지향, 또는 대내 지향 어느 쪽이어야 하는가는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기술과 문명의 세계적 발전으로부터 고립하여 한 사회가 스스로를 제대로 보전하기 어려운 것이 국제관계의 현실이다. 이것은 세계가 좁아져 가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내재적 관점에서의 평가를 떠나서, 세계에 대하여 스스로 문을 닫고 있는 나라, 버마(미얀마)나 북한의 상황도 이러한 국제적 연관 속에서 생각될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지금의 세계에서 바깥세상으로 열려 있지 못한 나라 가운데 하나가 쿠바이다. 그 중요 원인은 반세기에 걸친 미국의 봉쇄 정책인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집권과 함께 미국은 쿠바에 대하여 유연한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카스트로 전 총리가 크게 환영의 뜻을 표명한 것은 쿠바 자체가 고립으로 인하여 생기는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랫동안 쿠바는 그 나름대로 사회주의적 이상을 충실하게 실천해온 것으로 이야기되곤 했다. 쿠바에 굶는 사람은 없다. 또 쿠바는 교육, 의료, 고용 등 사회의 기본적 복지 제도가 공평하게 운영되고 있는 나라로 알려졌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의 상투적 인상과는 달리 영화관이나 극장이 번창하고, 보통 사람들이 오페라 공연을 즐긴다.
열려 있으면서도 자유 있어야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 세계 시장에 개방됨으로써 쿠바가 얻게 될 것은 허황된 소비주의 문화와 그에 이어져 있는 불평등과 사회 갈등일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적대적이라 할 수 없는 영국 가디언지의 최근 보도에 의하면, 쿠바 사람들이 기아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삶의 조건은 최소한도를 넘어서지 못한다. 먹는 것은 최소한의 전분과 지방에 한정되고, 휴지가 없고 비누가 없다. 쿠바 사람들은 채소, 과일, 고기, 비누, 휴지, 구두, 의류 등의 일상 용품에 더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기를 원한다. 하루의 임금은 토마토 몇 개, 양파 몇 개 정도를 살 수 있는 80센트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직장 밖에서 가외의 일감을 찾아야 한다. “나라가 제공하는 직장에서는 임금을 지급하는 체하고 우리도 일을 하는 체 할 뿐”이라고 한 쿠바인의 말을 가디언은 인용하고 있다.
쿠바의 고립은 미국의 봉쇄정책이 원인이다. 그러나 그에 관계없이 중요한 사실은 오늘의 세계에서 한 국가만의 자급자족 경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쿠바가 새로운 열림의 관계를 원한다고 하여, 적어도 지금의 시점에서는, 자본주의의 모든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다. 가디언이 인용하고 있는 한 쿠바인은 “아무도 완전히 자본주의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혁명의 좋은 소득을 보존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회주의적 폐쇄성에 얽매이지 않는 사회들도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서 비슷한 문제에 부딪힌다고 할 수 있다. 시장은-특히 공동체의 테두리를 벗어나 세계화된 시장은 목적과 가치가 부재하는 수단의 공간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자유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 수단을 의미있는 수단이 되게 할 목적과 가치는 다른 곳에서 올 수밖에 없다. 열려 있으면서 또 자유를 잃지 않으면서 어떻게 고유한 인간 가치를 보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지금의 세계에서 모든 사회의 문제이다.
<김우창|고려대 명예교수>
입력 : 2009-05-20 18:12:18ㅣ수정 :
[김우창 칼럼]죽음의 이편에서
입력 : 2009-06-03 18:07:22ㅣ수정 :
희랍의 옛 이야기에 이런 것이 있다. 솔론이 그의 죽은 아들을 두고 우는 것을 보고 어떤 사람이 “울어보아야 소용이 없는 일을 가지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우시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솔론은 “바로 울어보아야 소용이 없기 때문이라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어떤 현실의 절실성은 오로지 행동적으로, 정서적으로도 즉각적인 반응만을 허용한다. 지금 이 시점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애도하는 일뿐이다.
노 전 대통령 비극은 시대의 비극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아니할 수 없다. 다만 여기에 적는 것들이 그것을 손상하는 것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고위 정치지도자의 자결은 흔한 일이 아니다. 근대사에서는 한말 국난 시대 이후 이번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결은 최초의 일이 아닌가 한다. 그것이 국민 전체의 가슴에 충격과 아픔을 안겨준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것은 애도 행사의 규모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따르는 열렬한 추종자가 많은 탓이기도 하겠지만, 범국민적 열파가 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죽음은 사람의 일 가운데 가장 심각하고 엄숙한 일이다. 그러면서 그것은 어디에나 있고 넓어진 오늘의 삶의 공간에서 일상적 뉴스가 되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대통령 또는 대통령을 지냈던 분의 죽음은 보통 사람의 죽음과는 다른 것이라고 느낀다. 또 그의 삶은 낱낱의 삶들을 넘어 우리 모두의 삶을 하나의 상징 속에 집약하는 것으로 느낀다.
사람들은 지도자에 대해서는 본능적 일체감을 갖는다. 대통령의 언어나 행동이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고 시비하는 것들을 보지만, 역설적으로 그것도 지도자의 삶의 모습이 자신의 삶의 이상에 일치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의 삶, 이미지 그리고 죽음에 이르게 된 정황 - 이 모든 것에서 많은 국민이 쉽게 자신을 일치시켜 느낄 수 있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서민들의 심정에 호소하는 민중의 대통령으로 알려져 있지만, 죽음에 이르게 되기까지의 정황도 사람들이 쉽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검찰 수사에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인상을 준 것도 그렇고, 수사 대상이 된 항목도 서민의 관점에서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지금 시점에서 그 어느 쪽이나 다 확인된 것이라 할 수 없지만, 문제가 된 돈은 주로 자식들의 삶을 위한 준비금이라는 성격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 걱정하는 것이야말로 사람들이 가장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일의 하나이다. 그 액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주장에는 이러한 심정적 공감이 작용했을 것이다. (물론 부패를 삶의 당연한 일부로 보는 우리 사회의 냉소주의도 여기에 관계된다.)
흔히 비극의 핵심으로 말하여지는 것은 두 개의 진리, 두 개의 윤리적 명령 사이에서 으깨어지는 영웅의 고통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이 반드시 이러한 비극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시대의 어려운 여건 아래에서 보통사람의 선택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집약하여 보여주는 것임은 사실이다. 그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이고 우리 시대의 비극이다.
어떤 경우에나 비극의 충격의 핵심에는 죽음이 있다. 바로 곁에 있는 것이면서도 잊고 사는 것이 죽음인데, 비극에서 우리는 그 엄청난 신비에 직면하게 된다. 목숨은 삶의 바탕 중의 바탕이다. 사람의 삶뿐만 아니라 지구 위의 거대한 생명 현상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이 삶은 죽음과 밀접하게 이어져 있다. “사활이 걸린 문제”라는 말이 있지만, 사실 산다는 것은 죽음을 멀리하기 위한 쉼 없는 노력과 투쟁을 의미한다. 그러나 역설은 막중한 의미의 삶과 죽음이 극히 가벼운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목숨이 있는 존재에 죽음은 절체절명의 대명제이지만, 그것은 간단히 선택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삶을 위한 모든 투쟁으로부터, 또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방법이다.
그런데 죽음이란 무엇인가. 노무현 전 대통령은 유서에서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라고 했다. 목숨에 매달려 있는 사람이 생각하듯이 이 세상은 삶과 죽음의 이분법으로 나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과 삶이 하나의 자연 과정의 일부라고 하면, 사람은 삶을 거치고 죽음을 거쳐 자연으로 돌아간다. 죽음의 기이한 평화는 이 회귀에서 온다.
미국의 시인 로빈슨 제퍼스의 주제 하나도 이것이다.
‘아름다운 바위여!’라는 시에서 그는 이것을 등산의 이야기로 전달하고 있다. 그는 아들과 아들의 친구와 함께 캘리포니아의 한 산에 갔다가 야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잠이 든 젊은이들 위로 야영의 불꽃 너머에 솟아 오른 바위를 본다. 바위는 그 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움 - “그 말 없이 뜨거운 열정, 깊은 고귀함, 순진무구한 아름다움”, 그리고 “우리의 운명의 밖에서 진행되고 있는 다른 운명”을 느끼게 한다. 그는 자신은 죽을 것이고, 자신의 아들도 살다 죽고 세계도 망하겠지만, 그가 보고 있는 바위는 지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다고 삶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는 다른 시에서 말한다. “삶은 아무 것도 아니고/…무덤들이 있는 이 섬의 언덕 위에서 내려다 보면/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다./그러나 이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거대한 자연에 비추어 볼 때, 삶과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거대한 지구의 지속을 깨달음으로써, 우리는 참으로 의미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삶을 아낄 수 있게 된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많은 비극이 일러주듯이, 이 삶과 이 삶에의 집착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하여 준다. 그것은 간단히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억압과 부패없는 평화세상 기대
그러나 그 경우에도 다른 삶, 전체로서의 삶은 지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죽음의 이편에 남아 있는 한, 사람은 삶을 위한 노력을 저버릴 수 없다. 그 삶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과 같은 비극이 없어야 한다. 억압도 없고 부패도 없어야 한다. (자신의 아이들에게 제퍼스는 사회를 너무 가까이 하지 말며 자연의 고독과 고통과 더불어 살라고, 또 “부패는 강제 의무 규정이 된 일이 없다”고 하며 부패를 멀리 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삶을 바르게 보는 데에는 죽음의 눈이 필요하다.
죽음과 자연의 영원함에 대한 깨달음은 삶의 허무와 아름다움에 감격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을 만들어 낸다. 말 없이 뜨거운 열정,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고귀함, 순진무구한 아름다움이 있는 삶 - 그것이 이러한 자연의 대원리에 따라 삶을 설계하는 기초가 된다.
인간적인 삶은 결코 미움의 아우성과 열광의 산물일 수 없다.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견딜 수 없는 삶의 고통으로부터 죽음의 고통으로, 그리고 그 저편으로 옮겨 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찾은 것도 모든 것을 넘어가는 초연함과 여유 - 그리고 무엇보다도 평화일 것이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노 전 대통령 비극은 시대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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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 정치지도자의 자결은 흔한 일이 아니다. 근대사에서는 한말 국난 시대 이후 이번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결은 최초의 일이 아닌가 한다. 그것이 국민 전체의 가슴에 충격과 아픔을 안겨준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것은 애도 행사의 규모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따르는 열렬한 추종자가 많은 탓이기도 하겠지만, 범국민적 열파가 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죽음은 사람의 일 가운데 가장 심각하고 엄숙한 일이다. 그러면서 그것은 어디에나 있고 넓어진 오늘의 삶의 공간에서 일상적 뉴스가 되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대통령 또는 대통령을 지냈던 분의 죽음은 보통 사람의 죽음과는 다른 것이라고 느낀다. 또 그의 삶은 낱낱의 삶들을 넘어 우리 모두의 삶을 하나의 상징 속에 집약하는 것으로 느낀다.
사람들은 지도자에 대해서는 본능적 일체감을 갖는다. 대통령의 언어나 행동이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고 시비하는 것들을 보지만, 역설적으로 그것도 지도자의 삶의 모습이 자신의 삶의 이상에 일치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의 삶, 이미지 그리고 죽음에 이르게 된 정황 - 이 모든 것에서 많은 국민이 쉽게 자신을 일치시켜 느낄 수 있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서민들의 심정에 호소하는 민중의 대통령으로 알려져 있지만, 죽음에 이르게 되기까지의 정황도 사람들이 쉽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검찰 수사에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인상을 준 것도 그렇고, 수사 대상이 된 항목도 서민의 관점에서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지금 시점에서 그 어느 쪽이나 다 확인된 것이라 할 수 없지만, 문제가 된 돈은 주로 자식들의 삶을 위한 준비금이라는 성격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 걱정하는 것이야말로 사람들이 가장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일의 하나이다. 그 액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주장에는 이러한 심정적 공감이 작용했을 것이다. (물론 부패를 삶의 당연한 일부로 보는 우리 사회의 냉소주의도 여기에 관계된다.)
흔히 비극의 핵심으로 말하여지는 것은 두 개의 진리, 두 개의 윤리적 명령 사이에서 으깨어지는 영웅의 고통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이 반드시 이러한 비극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시대의 어려운 여건 아래에서 보통사람의 선택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집약하여 보여주는 것임은 사실이다. 그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이고 우리 시대의 비극이다.
어떤 경우에나 비극의 충격의 핵심에는 죽음이 있다. 바로 곁에 있는 것이면서도 잊고 사는 것이 죽음인데, 비극에서 우리는 그 엄청난 신비에 직면하게 된다. 목숨은 삶의 바탕 중의 바탕이다. 사람의 삶뿐만 아니라 지구 위의 거대한 생명 현상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이 삶은 죽음과 밀접하게 이어져 있다. “사활이 걸린 문제”라는 말이 있지만, 사실 산다는 것은 죽음을 멀리하기 위한 쉼 없는 노력과 투쟁을 의미한다. 그러나 역설은 막중한 의미의 삶과 죽음이 극히 가벼운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목숨이 있는 존재에 죽음은 절체절명의 대명제이지만, 그것은 간단히 선택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삶을 위한 모든 투쟁으로부터, 또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방법이다.
그런데 죽음이란 무엇인가. 노무현 전 대통령은 유서에서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라고 했다. 목숨에 매달려 있는 사람이 생각하듯이 이 세상은 삶과 죽음의 이분법으로 나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과 삶이 하나의 자연 과정의 일부라고 하면, 사람은 삶을 거치고 죽음을 거쳐 자연으로 돌아간다. 죽음의 기이한 평화는 이 회귀에서 온다.
미국의 시인 로빈슨 제퍼스의 주제 하나도 이것이다.
‘아름다운 바위여!’라는 시에서 그는 이것을 등산의 이야기로 전달하고 있다. 그는 아들과 아들의 친구와 함께 캘리포니아의 한 산에 갔다가 야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잠이 든 젊은이들 위로 야영의 불꽃 너머에 솟아 오른 바위를 본다. 바위는 그 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움 - “그 말 없이 뜨거운 열정, 깊은 고귀함, 순진무구한 아름다움”, 그리고 “우리의 운명의 밖에서 진행되고 있는 다른 운명”을 느끼게 한다. 그는 자신은 죽을 것이고, 자신의 아들도 살다 죽고 세계도 망하겠지만, 그가 보고 있는 바위는 지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다고 삶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는 다른 시에서 말한다. “삶은 아무 것도 아니고/…무덤들이 있는 이 섬의 언덕 위에서 내려다 보면/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다./그러나 이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거대한 자연에 비추어 볼 때, 삶과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거대한 지구의 지속을 깨달음으로써, 우리는 참으로 의미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삶을 아낄 수 있게 된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많은 비극이 일러주듯이, 이 삶과 이 삶에의 집착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하여 준다. 그것은 간단히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억압과 부패없는 평화세상 기대
그러나 그 경우에도 다른 삶, 전체로서의 삶은 지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죽음의 이편에 남아 있는 한, 사람은 삶을 위한 노력을 저버릴 수 없다. 그 삶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과 같은 비극이 없어야 한다. 억압도 없고 부패도 없어야 한다. (자신의 아이들에게 제퍼스는 사회를 너무 가까이 하지 말며 자연의 고독과 고통과 더불어 살라고, 또 “부패는 강제 의무 규정이 된 일이 없다”고 하며 부패를 멀리 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삶을 바르게 보는 데에는 죽음의 눈이 필요하다.
죽음과 자연의 영원함에 대한 깨달음은 삶의 허무와 아름다움에 감격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을 만들어 낸다. 말 없이 뜨거운 열정,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고귀함, 순진무구한 아름다움이 있는 삶 - 그것이 이러한 자연의 대원리에 따라 삶을 설계하는 기초가 된다.
인간적인 삶은 결코 미움의 아우성과 열광의 산물일 수 없다.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견딜 수 없는 삶의 고통으로부터 죽음의 고통으로, 그리고 그 저편으로 옮겨 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찾은 것도 모든 것을 넘어가는 초연함과 여유 - 그리고 무엇보다도 평화일 것이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입력 : 2009-06-03 18:07:22ㅣ수정 :
[김우창칼럼]검소의 경제
입력 : 2009-06-17 18:13:32ㅣ수정 :
소위 ‘실패한 국가’로 말할 사람은 없겠지만, 지금의 한국 사회를 믿을 만한 안정된 질서를 이룩해낸 사회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불안정의 증상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고 그 자체의 동력학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근본은 역시 경제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지금의 불안정과 불안 아래에는(북한 핵을 논외로 하면), 세계적인 경제 위기가 있고, 가깝게는 우리 사회의 불안한 경제가 있다. 경제에 이어서 사회적으로 중요한 불안 요인은 심화되는 경제적 양극화이다. 이로 인한 사회의 불균형은 약간의 충격에도 커다란 폭풍우로 변화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경제위기 속 빈부 격차 심화
빈부 격차는 2004년 이후 계속 커지고 있었지만, 최근에 와서 특히 크게 벌어진 것으로 보도되었다. 금년 1·4분기 들어 하위 20% 소득 계층의 소득이 5.1% 줄어든 데 대하여, 상위 20%의 소득은 1.1%가 늘고, 그 소득차의 비율은 8.6 배가 되었고, 이것은 지금까지의 어느 때보다도 큰 것이다.(조선일보 6월5일자) 빈부의 상대적인 차이가 가져오는 심리적인 마찰과 질시(嫉視)의 문제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심각성은 그것의 절대적인 의미로 인한다 할 것이다. 위에 말한 하위 20%의 소득은 최저 생계비에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비정규직자로부터 시작하여 실직자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이것은 금년의 하반부에 더 악화될 것이라 한다. 여기에 대해서 적절한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와 함께 중요한 것은 세계적인 그리고 한국에서의 경제 회복이다.
사회 경제 정책과 관련하여 흔히 듣는 이야기가 성장과 분배 어느 쪽을 택하여야 하느냐 하는 논란이다. 경제회복 대책에도 이 논란이 따른다. 사람의 삶에는 서로 모순되는 것 같으면서 동시에 추진될 수밖에 없는 것들이 수다하다. 분배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데에 성장이 있어야 하고, 분배 없는 성장은 그 기초로서의 사회 안정을 확보할 수 없다. 지금의 한국 사회의 긴박한 과제들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선택의 어려움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서도 피할 수 없는 질문의 하나는 ‘성장의 한계’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1970년대 초에 이미 대두되었던 말이지만, 지금에 와서 인류가 직시하여야 할 사실은 성장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기후 변화, 자원 고갈, 환경의 황폐화가 성장 추구 경제의 결산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인간의 사회적인 소외, 공동체의 해체 그리고 인간성으로부터의 소외는 어쩌면 더 큰 부작용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이러한 문제점들은 여러 나라에서 긴급한 의제가 되었다.
최근의 세계 경제 위기와 관련하여 유럽에서는 성장이 없는 경제라는 주제가 중요한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문제를 집약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 영국의 경제학자 팀 잭슨이 금년 3월에 내놓은 보고서 ‘성장 없는 번영’이다. 잭슨 교수는 영국 정부 기관, ‘지속가능한 발전 위원회’의 위원장이다. 이번에 발표된 문서는 그의 개인 의견과 함께 영국 정부의 공식적 전망을 담고 있다고 할 것이다. 지금까지 서구 산업사회가 추구해왔던 경제 성장은 지구의 제한된 환경 조건 하에서 지속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이 잭슨 교수가 굳게 내세우는 기본 입장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작금의 경제 위기가 보여주듯이 성장이 중단되면, 기업, 고용, 빈곤의 심화 등 공황의 상태가 발생하게 된다. 이것은 그대로 방치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는 것은 단기적인 관점에서의 이야기이고 장기적으로는 경제의 적절한 운영은 여기에서 생기는 문제들을 조정하고 경제의 방향을 전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잭슨 교수는 내다본다. 소비가 줄게 됨에 따라 저축이 늘고, 부채가 줄고, 노동시간이 짧아지는 가운데 지속가능한 체제가 들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성장 없는 경제 체제하에서 소비 생활의 축소는 자가용 사용이나 휴가 여행이 줄고, (우리 식으로 말하여) 축제와 행사도 줄고. 일상적으로도 식도락이 아니라 절식(節食)이 실천 항목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무엇보다도 비싸고 화려한 것들을 과시함으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얻으려는 일들도 그만 두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것들을 조장하는 홍보 산업 또 생산업도 점차 퇴출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에서 중요한 문제점의 하나는 소비경제의 후퇴가 어느 정도이어야 하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금욕적 생활이나 내핍 생활만을 말한다면, 그것은 북한이나 쿠바와 같은 나라가 이미 달성한 목표이고 소위 후진국이라는 나라들이 좋든 싫든 견디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강요된 현실은 심히 괴로운 것일 수밖에 없다. 바람직한 것은 그것이 참다운 인간적 발전을 위한 선택의 결과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의 선택은 대체로 일방적으로 결심되는 것이라기보다는 현실이 무르익는 것에 맞추어 이루어지는 전환이다.
이렇게 볼 때, 사회와 인류의 미래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이 나올 수 있는 것이 소위 선진국이라는 사실로 미루어, 일단 선진국의 수준에 이르렀다가 다시 U턴을 하는 것이 역사의 현실 동력학이라는 생각이 든다. 잭슨 교수의 생각에는 U턴의 시점을 시사해주는 것이 있다. 그의 조사에 의하면, 현재 미국의 평균 개인 소득의 절반 또는 3분의 2 수준을 넘어선 후에는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감은 그 이상 올라가지 않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여러 부정적인 정신증후들이 나타난다. 물론 이것은 지금의 시점에서의 이야기이고 일단 역사적 회귀가 시작된 다음에 견적은 조금 더 낮은 수준의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도층 검소한 삶 모범 보여야
검소의 경제가 제도화될 수 있을까? 환경문제는 소비자와는 관계없는 ‘환경독재’로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이 있다. 검소의 경제는 엄청난 국가 권력의 확대를 요구할 수 있다. 그러면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의 증진을 의미하는 것이 될 것이다. 바람직한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스스로 검소의 경제를 실천하는 것이다. ‘소식(疏食)하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었으니 즐거움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은 논어에 그려진 행복의 한 모습이지만, 거기까지 이르지는 않더라도 스스로 절제하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는 것은 철인 교사들이 수없이 말하여 온 지혜이다. 문제는 이것이 개인적인 처세보감의 말로서 그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규범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그것이 풍속이 된다면, 규범의 억압성은 적지 아니 완화될 수 있다. 지도자들의 생활이 검소하여야 한다는 것은 예로부터 동양 정치 철학의 근본이다. 희랍의 민주주의나 로마의 공화체제에서도 그렇고 민주주의 도덕철학은 이것이 공공질서의 초석임을 되풀이 하여 강조하였다.
일정한 수준까지의 성장의 추구가 불가피하다고 하더라도, 지도층들의 검소한 삶의 모범은 지금 당장에라도 보여 줄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나 행복한 삶은, 경제가 성장하든 아니 하든, 번영보다는 검소에 있다. 번영이 추구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정신적 자기실현을 위한 것으로 전환됨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심화하는 것이 될 것이다. 사회적 격차, 성장과 분배 등의 문제는 지금 풀어나가야 할 당면 문제이면서, 더욱 큰 미래의 전망 속에서 생각되어야 할 의제이다.
<김우창|고려대 명예교수>
경제위기 속 빈부 격차 심화
빈부 격차는 2004년 이후 계속 커지고 있었지만, 최근에 와서 특히 크게 벌어진 것으로 보도되었다. 금년 1·4분기 들어 하위 20% 소득 계층의 소득이 5.1% 줄어든 데 대하여, 상위 20%의 소득은 1.1%가 늘고, 그 소득차의 비율은 8.6 배가 되었고, 이것은 지금까지의 어느 때보다도 큰 것이다.(조선일보 6월5일자) 빈부의 상대적인 차이가 가져오는 심리적인 마찰과 질시(嫉視)의 문제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심각성은 그것의 절대적인 의미로 인한다 할 것이다. 위에 말한 하위 20%의 소득은 최저 생계비에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비정규직자로부터 시작하여 실직자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이것은 금년의 하반부에 더 악화될 것이라 한다. 여기에 대해서 적절한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와 함께 중요한 것은 세계적인 그리고 한국에서의 경제 회복이다.
사회 경제 정책과 관련하여 흔히 듣는 이야기가 성장과 분배 어느 쪽을 택하여야 하느냐 하는 논란이다. 경제회복 대책에도 이 논란이 따른다. 사람의 삶에는 서로 모순되는 것 같으면서 동시에 추진될 수밖에 없는 것들이 수다하다. 분배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데에 성장이 있어야 하고, 분배 없는 성장은 그 기초로서의 사회 안정을 확보할 수 없다. 지금의 한국 사회의 긴박한 과제들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선택의 어려움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서도 피할 수 없는 질문의 하나는 ‘성장의 한계’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1970년대 초에 이미 대두되었던 말이지만, 지금에 와서 인류가 직시하여야 할 사실은 성장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기후 변화, 자원 고갈, 환경의 황폐화가 성장 추구 경제의 결산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인간의 사회적인 소외, 공동체의 해체 그리고 인간성으로부터의 소외는 어쩌면 더 큰 부작용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이러한 문제점들은 여러 나라에서 긴급한 의제가 되었다.
최근의 세계 경제 위기와 관련하여 유럽에서는 성장이 없는 경제라는 주제가 중요한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문제를 집약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 영국의 경제학자 팀 잭슨이 금년 3월에 내놓은 보고서 ‘성장 없는 번영’이다. 잭슨 교수는 영국 정부 기관, ‘지속가능한 발전 위원회’의 위원장이다. 이번에 발표된 문서는 그의 개인 의견과 함께 영국 정부의 공식적 전망을 담고 있다고 할 것이다. 지금까지 서구 산업사회가 추구해왔던 경제 성장은 지구의 제한된 환경 조건 하에서 지속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이 잭슨 교수가 굳게 내세우는 기본 입장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작금의 경제 위기가 보여주듯이 성장이 중단되면, 기업, 고용, 빈곤의 심화 등 공황의 상태가 발생하게 된다. 이것은 그대로 방치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는 것은 단기적인 관점에서의 이야기이고 장기적으로는 경제의 적절한 운영은 여기에서 생기는 문제들을 조정하고 경제의 방향을 전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잭슨 교수는 내다본다. 소비가 줄게 됨에 따라 저축이 늘고, 부채가 줄고, 노동시간이 짧아지는 가운데 지속가능한 체제가 들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성장 없는 경제 체제하에서 소비 생활의 축소는 자가용 사용이나 휴가 여행이 줄고, (우리 식으로 말하여) 축제와 행사도 줄고. 일상적으로도 식도락이 아니라 절식(節食)이 실천 항목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무엇보다도 비싸고 화려한 것들을 과시함으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얻으려는 일들도 그만 두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것들을 조장하는 홍보 산업 또 생산업도 점차 퇴출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에서 중요한 문제점의 하나는 소비경제의 후퇴가 어느 정도이어야 하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금욕적 생활이나 내핍 생활만을 말한다면, 그것은 북한이나 쿠바와 같은 나라가 이미 달성한 목표이고 소위 후진국이라는 나라들이 좋든 싫든 견디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강요된 현실은 심히 괴로운 것일 수밖에 없다. 바람직한 것은 그것이 참다운 인간적 발전을 위한 선택의 결과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의 선택은 대체로 일방적으로 결심되는 것이라기보다는 현실이 무르익는 것에 맞추어 이루어지는 전환이다.
이렇게 볼 때, 사회와 인류의 미래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이 나올 수 있는 것이 소위 선진국이라는 사실로 미루어, 일단 선진국의 수준에 이르렀다가 다시 U턴을 하는 것이 역사의 현실 동력학이라는 생각이 든다. 잭슨 교수의 생각에는 U턴의 시점을 시사해주는 것이 있다. 그의 조사에 의하면, 현재 미국의 평균 개인 소득의 절반 또는 3분의 2 수준을 넘어선 후에는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감은 그 이상 올라가지 않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여러 부정적인 정신증후들이 나타난다. 물론 이것은 지금의 시점에서의 이야기이고 일단 역사적 회귀가 시작된 다음에 견적은 조금 더 낮은 수준의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도층 검소한 삶 모범 보여야
검소의 경제가 제도화될 수 있을까? 환경문제는 소비자와는 관계없는 ‘환경독재’로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이 있다. 검소의 경제는 엄청난 국가 권력의 확대를 요구할 수 있다. 그러면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의 증진을 의미하는 것이 될 것이다. 바람직한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스스로 검소의 경제를 실천하는 것이다. ‘소식(疏食)하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었으니 즐거움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은 논어에 그려진 행복의 한 모습이지만, 거기까지 이르지는 않더라도 스스로 절제하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는 것은 철인 교사들이 수없이 말하여 온 지혜이다. 문제는 이것이 개인적인 처세보감의 말로서 그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규범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그것이 풍속이 된다면, 규범의 억압성은 적지 아니 완화될 수 있다. 지도자들의 생활이 검소하여야 한다는 것은 예로부터 동양 정치 철학의 근본이다. 희랍의 민주주의나 로마의 공화체제에서도 그렇고 민주주의 도덕철학은 이것이 공공질서의 초석임을 되풀이 하여 강조하였다.
일정한 수준까지의 성장의 추구가 불가피하다고 하더라도, 지도층들의 검소한 삶의 모범은 지금 당장에라도 보여 줄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나 행복한 삶은, 경제가 성장하든 아니 하든, 번영보다는 검소에 있다. 번영이 추구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정신적 자기실현을 위한 것으로 전환됨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심화하는 것이 될 것이다. 사회적 격차, 성장과 분배 등의 문제는 지금 풀어나가야 할 당면 문제이면서, 더욱 큰 미래의 전망 속에서 생각되어야 할 의제이다.
<김우창|고려대 명예교수>
입력 : 2009-06-17 18:13:32ㅣ수정 :
[김우창칼럼]해외 한국학과 보편적 지평
입력 : 2009-07-01 18:12:11ㅣ수정 :
지난 6월18일부터 21일까지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미주 한국학에 대한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한국에서 온 몇 학자들과 함께 미국과 캐나다의 여러 한국학 교수와 대학원생들이 참가했다. 이 회의에 참가할 기회를 얻은 필자로서는 해외의 한국학 연구가 많이 발전하고 또 연구자들의 관심이 진지한 것에 적지 않은 감명을 받았다.
해외 한국학의 성숙도는 이번 회의의 전체 주제로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의 전통시, 미학, 근대로의 이행’이 이번 회의의 총체적 주제였다. 전통문화의 부분을 주도한 것은 고려대 김흥규 교수의 발표였는데, 조선조의 시가를 시대적 변화 속에서 이해하면서 세부에 대한 훈고(訓고)를 포함하는 발표는 어느 회의에 비추어도 성숙한 수준의 논의를 끌어내었다. 이와는 별개로, 필자에게 근본 문제로 생각되었던 것은 해외에서의 한국학 위상이었다. 거기에는 그 발전과 성숙에도 불구하고 그 불확실성에 대한 의식이 잠재해 있었다. 그것은 국내에서나 국외에서나 오늘날의 인문과학 연구가 공유하고 있는 의식이기도 했다.
발전 불구 불확실성 의식 잠재
한국인이 한국인으로서 한국을 공부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과 자신의 사회를 아는 것이고 그것을 새롭게 세우는 데에 기초를 닦는 일이다.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 한국계 미국인 또는 해외에 정착한 한국계 사람들이 한국을 공부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일이다. 어쩌면 뿌리를 알아야 할 필요가 이들에게 더 절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 나라에 사는 사람의 경우와는 달리, 나라를 떠난 사람들에게 정체성의 획득은 더 적극적 노력을 요구한다. 그런데 미국인 또는 다른 외국인에게 한국 공부는 어떤 의의를 갖는가? 특히 대학의 학부 수준에서 그 의의는 어디에 있을까? 해외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사람은 이 문제를 늘 생각해야 한다.
미국 대학에서는 학생들의 교양 교육의 일부로서 문명의 계열에 따라-가령 서양 문명, 중동 문명, 동아시아 문명 등의 구분에 따라 일정한 학점 취득을 요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국 공부는 이 문명 계열에 대한 지식의 일부를 이루어 다른 동아시아 문명 과목들과 함께 인간 문명의 다양성을 살피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이 된다.
서양의 교양교육에 비서양 세계에 대한 과목이 포함된 것은 역사적으로 별로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이러한 수정이 있기 이전, 교양교육은 서양 문명에 대한 공부를 그 주된 내용으로 했다. 그러다가 인간 문명화의 역사가 서양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커짐에 따라, 다른 문명에 대한 공부가 교양의 일부로 포함된 것이다. 전통적으로 교양의 테두리에서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사실을 아는 것 외에 그 의미를 해석하여 내면화하는 작업을 말한다. 그러면서 넓은 보편적 인간성의 지평으로 나아가는 것을 꾀하는 것이다. 한국의 대학에서 교양 과목이라고 할 때, 교양의 뜻이 정확히 무엇인지 분명치 않고, 영어에서는 거기에 해당되는 적절한 말을 잡아내기 쉽지 않지만, 그 원뜻은 독일어의 교양-‘빌둥(bildung)’에서 찾을 수 있고, 헤겔이 설명한 바, ‘보편성에로의 고양’이라는 말은 그 깊은 뜻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교양은 사람의 생각과 느낌 그리고 행동 방식-인간의 됨됨이를 넓히고 깊게 하는 과정이다.
오늘날 교양 그리고 교육은 공리적 목적을 위한 정보 축적을 말하는 것이 되었지만, 지금도 이러한 인문학적인 이상이 완전히 버려진 것은 아니다. 교양 교육의 일부로서 한국 공부를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어떻게 인간성의 보편적 고양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한국의 역사와 전통과 문화, 그리고 문학을 공부하는 것이 피교육자의 정체성 형성에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정체성의 보편적 고양에도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기대를 포함한다 할 수 있다.
한국문화나 문학을 해외에 소개할 때, “한국 문화의 우수성”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을 본다.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우리 문화 소개는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알린다는 표어로 설명되었다. 이러한 표어가 반드시 호소력이 있는 말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가령 미국인들이 “미국 문화의 우수성”, 독일인들이 “독일 문화의 우수성”, 몽골인들이 “몽골 문화의 우수성”이라는 말을 들고 우리를 찾아오는 경우를 생각해볼 일이다), 이 말은 보편적인 문화의 기준에서 사람의 삶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 한국 문화에 있다는 사실을 내세우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학문의 대상으로서, 특히 교양교육의 일부로서 한국 문화를 공부하게 할 때, 위의 경우보다는 더 확실하게, 그것이 보편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소신은 필수적인 전제가 된다. (예외는 특별한 직업적 의미를 갖는 한국 사정에 관한 한국정보학이다.)
그렇다고 외국에 보여주는 우리 문화가-우리 자신의 관점에서도, 반드시 가장 높은 보편성을 가진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는 일이다. 너무 쉽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보편성의 진리의 기준을 잃어버리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이(異)문화를 아는 것은 그 자체로 삶의 폭을 넓혀주는 일을 한다. 과거에서 오는 문화도 오늘의 관점에서는 일단 이문화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이질적인 것이 참으로 우리의 삶을 넓혀주는 것이 된다면, 그것은 그것을 수용하는 인간 능력의 통합 작용을 통해서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과거의 문화 유산도 비판적으로 새로운 테두리 속에 용해함으로써 보편성에로의 도약을 돕게 된다.
해석의 지평 넓혀가는 일 중요
시카고 회의 중에는 동아대학의 한수영 교수가 당대의 가요를 기타반주로 연주하여 소개하는 교환의 시간이 있었다. 노래의 가사가 된 현대시에는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있었다. 이 제목은 곧 당 시인 두보의 ‘춘망(春望)’을 연상케 한다. 두보 시의 시작은, ‘나라가 깨어졌는데 산과 강은 있고/ 성 안의 봄에는 풀과 나무가 깊다’라는 것이다. 두보의 시는 자연의 지속과 인간사의 흥망 둘 사이의 간격을 대조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이상화의 시는 나라의 흥망과 자연의 움직임이 하나여야 한다는 도덕적 요청을 담고 있다. 두보의 시에서, 자연과 인간사의 간격은 비극적인 느낌을 깊이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조금은 위안과 초연의 틈을 제공한다. 그러한 점에서, 적어도 필자의 생각으로는, 망국의 비통함에 대한 이상화의 절규에 비하여, 두보의 시는 조금 더 넓은 존재론적 인식을 함축한다. 그러나 망국에 따르는 두 가지 반응을 아울러 살펴보는 기회를 갖는 것은 인간의 운명과 감성의 변주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더 넓게 하는 일이 된다.
큰 문제를 작은 해석 속에 담아보려 한 위의 예가 적절한 것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인간 체험의 좋은 표현을 제시하는 일에 못지 않게 그 해석의 지평을 넓혀가는 일이다.
이것이 해외 한국학의 발전에 필요한 일이기도 하고 한국의 한국학 그리고 인문과학이 받아들여야 하는 과제일 것이다. 필자가 시카고 회의에 참석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 하나가 이러한 것이었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해외 한국학의 성숙도는 이번 회의의 전체 주제로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의 전통시, 미학, 근대로의 이행’이 이번 회의의 총체적 주제였다. 전통문화의 부분을 주도한 것은 고려대 김흥규 교수의 발표였는데, 조선조의 시가를 시대적 변화 속에서 이해하면서 세부에 대한 훈고(訓고)를 포함하는 발표는 어느 회의에 비추어도 성숙한 수준의 논의를 끌어내었다. 이와는 별개로, 필자에게 근본 문제로 생각되었던 것은 해외에서의 한국학 위상이었다. 거기에는 그 발전과 성숙에도 불구하고 그 불확실성에 대한 의식이 잠재해 있었다. 그것은 국내에서나 국외에서나 오늘날의 인문과학 연구가 공유하고 있는 의식이기도 했다.
발전 불구 불확실성 의식 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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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나라에 사는 사람의 경우와는 달리, 나라를 떠난 사람들에게 정체성의 획득은 더 적극적 노력을 요구한다. 그런데 미국인 또는 다른 외국인에게 한국 공부는 어떤 의의를 갖는가? 특히 대학의 학부 수준에서 그 의의는 어디에 있을까? 해외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사람은 이 문제를 늘 생각해야 한다.
미국 대학에서는 학생들의 교양 교육의 일부로서 문명의 계열에 따라-가령 서양 문명, 중동 문명, 동아시아 문명 등의 구분에 따라 일정한 학점 취득을 요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국 공부는 이 문명 계열에 대한 지식의 일부를 이루어 다른 동아시아 문명 과목들과 함께 인간 문명의 다양성을 살피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이 된다.
서양의 교양교육에 비서양 세계에 대한 과목이 포함된 것은 역사적으로 별로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이러한 수정이 있기 이전, 교양교육은 서양 문명에 대한 공부를 그 주된 내용으로 했다. 그러다가 인간 문명화의 역사가 서양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커짐에 따라, 다른 문명에 대한 공부가 교양의 일부로 포함된 것이다. 전통적으로 교양의 테두리에서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사실을 아는 것 외에 그 의미를 해석하여 내면화하는 작업을 말한다. 그러면서 넓은 보편적 인간성의 지평으로 나아가는 것을 꾀하는 것이다. 한국의 대학에서 교양 과목이라고 할 때, 교양의 뜻이 정확히 무엇인지 분명치 않고, 영어에서는 거기에 해당되는 적절한 말을 잡아내기 쉽지 않지만, 그 원뜻은 독일어의 교양-‘빌둥(bildung)’에서 찾을 수 있고, 헤겔이 설명한 바, ‘보편성에로의 고양’이라는 말은 그 깊은 뜻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교양은 사람의 생각과 느낌 그리고 행동 방식-인간의 됨됨이를 넓히고 깊게 하는 과정이다.
오늘날 교양 그리고 교육은 공리적 목적을 위한 정보 축적을 말하는 것이 되었지만, 지금도 이러한 인문학적인 이상이 완전히 버려진 것은 아니다. 교양 교육의 일부로서 한국 공부를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어떻게 인간성의 보편적 고양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한국의 역사와 전통과 문화, 그리고 문학을 공부하는 것이 피교육자의 정체성 형성에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정체성의 보편적 고양에도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기대를 포함한다 할 수 있다.
한국문화나 문학을 해외에 소개할 때, “한국 문화의 우수성”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을 본다.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우리 문화 소개는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알린다는 표어로 설명되었다. 이러한 표어가 반드시 호소력이 있는 말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가령 미국인들이 “미국 문화의 우수성”, 독일인들이 “독일 문화의 우수성”, 몽골인들이 “몽골 문화의 우수성”이라는 말을 들고 우리를 찾아오는 경우를 생각해볼 일이다), 이 말은 보편적인 문화의 기준에서 사람의 삶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 한국 문화에 있다는 사실을 내세우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학문의 대상으로서, 특히 교양교육의 일부로서 한국 문화를 공부하게 할 때, 위의 경우보다는 더 확실하게, 그것이 보편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소신은 필수적인 전제가 된다. (예외는 특별한 직업적 의미를 갖는 한국 사정에 관한 한국정보학이다.)
그렇다고 외국에 보여주는 우리 문화가-우리 자신의 관점에서도, 반드시 가장 높은 보편성을 가진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는 일이다. 너무 쉽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보편성의 진리의 기준을 잃어버리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이(異)문화를 아는 것은 그 자체로 삶의 폭을 넓혀주는 일을 한다. 과거에서 오는 문화도 오늘의 관점에서는 일단 이문화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이질적인 것이 참으로 우리의 삶을 넓혀주는 것이 된다면, 그것은 그것을 수용하는 인간 능력의 통합 작용을 통해서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과거의 문화 유산도 비판적으로 새로운 테두리 속에 용해함으로써 보편성에로의 도약을 돕게 된다.
해석의 지평 넓혀가는 일 중요
시카고 회의 중에는 동아대학의 한수영 교수가 당대의 가요를 기타반주로 연주하여 소개하는 교환의 시간이 있었다. 노래의 가사가 된 현대시에는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있었다. 이 제목은 곧 당 시인 두보의 ‘춘망(春望)’을 연상케 한다. 두보 시의 시작은, ‘나라가 깨어졌는데 산과 강은 있고/ 성 안의 봄에는 풀과 나무가 깊다’라는 것이다. 두보의 시는 자연의 지속과 인간사의 흥망 둘 사이의 간격을 대조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이상화의 시는 나라의 흥망과 자연의 움직임이 하나여야 한다는 도덕적 요청을 담고 있다. 두보의 시에서, 자연과 인간사의 간격은 비극적인 느낌을 깊이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조금은 위안과 초연의 틈을 제공한다. 그러한 점에서, 적어도 필자의 생각으로는, 망국의 비통함에 대한 이상화의 절규에 비하여, 두보의 시는 조금 더 넓은 존재론적 인식을 함축한다. 그러나 망국에 따르는 두 가지 반응을 아울러 살펴보는 기회를 갖는 것은 인간의 운명과 감성의 변주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더 넓게 하는 일이 된다.
큰 문제를 작은 해석 속에 담아보려 한 위의 예가 적절한 것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인간 체험의 좋은 표현을 제시하는 일에 못지 않게 그 해석의 지평을 넓혀가는 일이다.
이것이 해외 한국학의 발전에 필요한 일이기도 하고 한국의 한국학 그리고 인문과학이 받아들여야 하는 과제일 것이다. 필자가 시카고 회의에 참석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 하나가 이러한 것이었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입력 : 2009-07-01 18:12:11ㅣ수정 :
[김우창칼럼]공항의 인간대열
입력 : 2009-07-15 18:08:55ㅣ수정 :
여러 해 만에 간 탓인지 시카고 공항은 불황이라는데도, 특히 사람이 북적이는 것을 느꼈다. 북적이는 원인 가운데 하나는 지난 수십년간 항공기 여행이 확장일로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공항은 붐비는 장터와 같은 곳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환경 문제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생활의 편의가 널리 보급되고, 정치적으로 말하면 민주화되어 간다는 증표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진전은 흔히 사람이 대규모 군중 사이에서 느끼는 소외와 비인간화를 일반화한다.
물론 공항에서 사람들이 타야 할 비행기를 찾아가고 물건을 사고 음식을 사먹고 하는 일들이 혼돈 속에 빠져 있다는 것은 아니다. 출발시간과 갈 길이 수없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사람들은 제 갈 길을 찾아간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전체적인 질서를 유지하는 데에는 엄청난 체계적 협동과 조절이 필요할 것이다.
상호관계 없는 통일된 집단
기이하다면 기이한 것은 이 질서가 공항에 모이는 사람들의 상호 작용으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 공간 속에서 움직이고 있지만, 그들은 서로 간에 어떤 적극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관계-승객 일반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통일된 단위를 이루면서도 그것을 구성하는 사람들 사이에 거의 상호 작용이 없는 집단 관계를 장 폴 사르트르는 일찍이 ‘대열(serie)’이라는 이름으로 부른 바 있다. 대열의 가장 간단한 예는 파리의 생제르맹 가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이루는 집단은 일시적이고 우연적이며 그들의 관계는 전적으로 외면적인 것이다. 이러한 집단이 생겨나는 과정을 사르트르는 ‘군중화 (massification)’라 한다.
그에게는 이러한 것보다는 활성화된 다중 관계가 바람직한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 대열의 산만한 관계가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통일하고 있는 것은 그들 밖에 있는 체제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해관계는 체제에 일치한다. 그들의 관계는 서로 서로에 대하여 단순화되고 일반화되고 외면적인 것이다. 그들의 정체성도 단순화되어야 한다. 여행객은 여행객 이상의 존재가 되지 않아야 한다. 자세와 움직임도 이 조건에 맞아야 하고, 수하물과 휴대품도 규격에 따라야 하고 그에 수반하는 서류가 제대로 갖추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수송과 운반의 필요상 불가피한 것임을 인정하는 까닭에 이러한 단순화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것들은 체제에 승복할 것을 요구하지만, 사람들은 이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에 오히려 불만과 불편을 느낀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단순화가 여행의 시간을 넘어서 지속적인 것이 된다면, 그 안에서의 인생이 편리하고 만족할 만할 것일까? 거기에서 느끼는 고독과 소외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될 것이다. 사실 편리한 것이면서도 사람들은 이미 커다란 체제에서 비인간적인 것을 느낀다. 단순화된 편의의 관계에서도 인간적인 친절과 배려를 느끼고자 하는 것이 인간이다. 속도의 시대가 되기 오래 전, 나는 캐나다의 한 공항에서 나의 기다림의 불편함을 덜어줄 생각으로 이리저리 다른 연결을 알아보려고 ‘자신의 의무의 요청’을 훨씬 넘어 몇 십분을 노력하는 한 항공사 직원에 감동을 느낀 일이 있다.
사르트르가 대열을 정의하려고 한 것은 대열적 현실 순응적 관계가 정치 행동을 위한 의식화된 집단으로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해보고자 한 때문이었다. 정치 행동은 정치 행동대로, 그 자신도 인정한 바와 같이, 하나의 정치적 목적에 의하여 ‘다양하고 풍부한 종합’으로서의 개인을 단순화한다. 문제의 해결은 커다란 결속의 가능성에 못지않게 작은 인간관계의 진솔성을 약속하는 사회 풍습에서 찾아야 하는지 모른다.
생제르맹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서로에 대하여 무관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인간 관계 전부가 그러한 것은 아니다. 무관심은 가정이나 직장 등 그들의 집단이 달리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그들은 달리 추구하는 계획과 목표들이 있다. 이것들은 그들의 내면적 삶의 일부가 된다. 물론 이러한 것들이 그들의 자의로만 추구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을 규정하고 있는 큰 틀은 역사적, 사회적으로 형성된 생산과 재생산 체제다. 정치적으로, 그러한 체제의 하나는 파리 시이다. 그들은 파리의 시민이다. 이 마지막 집단 범주가 그들로 하여금 일정한 질서 속에서 버스 정류장에 모여 서있게 하는 것이다. 더욱 직접적으로는 그들이 기다리는 버스는, 사영이든 공영이든, 시민들의 조직으로서의 시의 책임있는 관리 안에 들어 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그들은 개인으로서 서로 서로에 대하여 갖는 관계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버스를 같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갑자기 쓰러지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때의 행동은 더 원초적인 인간관계에 의하여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의 건전한 존재가 사람들이 편한 마음으로 버스를 타고 길거리를 가고, 일하고 집으로 가고 하는 삶의 바탕을 이룬다. 물론 이러한 관계는 다시 순환적으로 전체 체제에 의하여 규정된다.
체제의 비인간화로 ‘군중화’
오늘의 미국의 공항에서 많이 소멸한 것이, 체제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도 존재할 수 있는, 인간적인 배려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것은 군중화 현상 또는 더 물리적인 의미에서 공항의 규모가 흔히 말하는 ‘인간적 규모’를 넘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 사회 자체에서 일어난 변화도 여기에 관계되어 있다. 체제의 크기는-또는 단일화된 공간의 크기만도-비인간화를 낳는다. 오늘의 능률과 경비절약의 원리는 삶의 공간에 다른 고려가 들어 갈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거기에다가 국가 기구의 비대화는 모든 국지적인 섬세한 인간관계를 불가능하게 한다. 테러에 대한 전쟁이 선포된 후 국가는 거의 절대화된 힘이 되었다. 공항에서 여행자는 더없이 비인간화된 보안검사에 처하게 된다. 겨드랑이 밑으로부터 신발 아래까지 샅샅이 뒤지는 검사, 입국서류 심사 시의 지문 채취 등은 여행자를 완전히 객체화한다. 이러한 객체화가 공항의 문화로 전파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체제의 비인간화에 대한 원형은 미국 사회에 이미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1930년대의 작가 너대니얼 웨스트의 <메뚜기가 몰려오는 날>은 할리우드의 인생들을 그려내려고 한 작품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 군중 장면은 할리우드 그리고 미국 사회의 의미를 우화적으로 요약한다. 이 장면에서 영화의 개봉에 맞추어 출현한다는 실물 주연배우를 보기 위하여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러나 군중은 얼마 안 있어서 폭도로 변하게 된다. 그들은 할리우드가 조장하는 각종의 허황되고 속된 꿈으로 들떠 있으면서 동시에 마음에는 절망과 울분을 가득 담고 있다. 그들의 희망과 함께 실패를 말하여 주는 것이 이러한 꿈들이기 때문이다. 이 헛된 꿈들은 그들의 삶으로부터 구체적인 내용을 빼앗아 간다. 이것을 보상해주는 것이 집단 폭력이다. 웨스트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할리우드와 미국 사회에 대한 우화이면서 모든 소비주의 사회에 대한 우화이기도 하다. 거대해진 공항의 경험도, 대열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대중화되는 인간에 대한 우화에 관계된다 할 수 있다.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
물론 공항에서 사람들이 타야 할 비행기를 찾아가고 물건을 사고 음식을 사먹고 하는 일들이 혼돈 속에 빠져 있다는 것은 아니다. 출발시간과 갈 길이 수없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사람들은 제 갈 길을 찾아간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전체적인 질서를 유지하는 데에는 엄청난 체계적 협동과 조절이 필요할 것이다.
상호관계 없는 통일된 집단
![]() |
그에게는 이러한 것보다는 활성화된 다중 관계가 바람직한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 대열의 산만한 관계가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통일하고 있는 것은 그들 밖에 있는 체제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해관계는 체제에 일치한다. 그들의 관계는 서로 서로에 대하여 단순화되고 일반화되고 외면적인 것이다. 그들의 정체성도 단순화되어야 한다. 여행객은 여행객 이상의 존재가 되지 않아야 한다. 자세와 움직임도 이 조건에 맞아야 하고, 수하물과 휴대품도 규격에 따라야 하고 그에 수반하는 서류가 제대로 갖추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수송과 운반의 필요상 불가피한 것임을 인정하는 까닭에 이러한 단순화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것들은 체제에 승복할 것을 요구하지만, 사람들은 이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에 오히려 불만과 불편을 느낀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단순화가 여행의 시간을 넘어서 지속적인 것이 된다면, 그 안에서의 인생이 편리하고 만족할 만할 것일까? 거기에서 느끼는 고독과 소외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될 것이다. 사실 편리한 것이면서도 사람들은 이미 커다란 체제에서 비인간적인 것을 느낀다. 단순화된 편의의 관계에서도 인간적인 친절과 배려를 느끼고자 하는 것이 인간이다. 속도의 시대가 되기 오래 전, 나는 캐나다의 한 공항에서 나의 기다림의 불편함을 덜어줄 생각으로 이리저리 다른 연결을 알아보려고 ‘자신의 의무의 요청’을 훨씬 넘어 몇 십분을 노력하는 한 항공사 직원에 감동을 느낀 일이 있다.
사르트르가 대열을 정의하려고 한 것은 대열적 현실 순응적 관계가 정치 행동을 위한 의식화된 집단으로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해보고자 한 때문이었다. 정치 행동은 정치 행동대로, 그 자신도 인정한 바와 같이, 하나의 정치적 목적에 의하여 ‘다양하고 풍부한 종합’으로서의 개인을 단순화한다. 문제의 해결은 커다란 결속의 가능성에 못지않게 작은 인간관계의 진솔성을 약속하는 사회 풍습에서 찾아야 하는지 모른다.
생제르맹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서로에 대하여 무관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인간 관계 전부가 그러한 것은 아니다. 무관심은 가정이나 직장 등 그들의 집단이 달리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그들은 달리 추구하는 계획과 목표들이 있다. 이것들은 그들의 내면적 삶의 일부가 된다. 물론 이러한 것들이 그들의 자의로만 추구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을 규정하고 있는 큰 틀은 역사적, 사회적으로 형성된 생산과 재생산 체제다. 정치적으로, 그러한 체제의 하나는 파리 시이다. 그들은 파리의 시민이다. 이 마지막 집단 범주가 그들로 하여금 일정한 질서 속에서 버스 정류장에 모여 서있게 하는 것이다. 더욱 직접적으로는 그들이 기다리는 버스는, 사영이든 공영이든, 시민들의 조직으로서의 시의 책임있는 관리 안에 들어 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그들은 개인으로서 서로 서로에 대하여 갖는 관계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버스를 같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갑자기 쓰러지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때의 행동은 더 원초적인 인간관계에 의하여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의 건전한 존재가 사람들이 편한 마음으로 버스를 타고 길거리를 가고, 일하고 집으로 가고 하는 삶의 바탕을 이룬다. 물론 이러한 관계는 다시 순환적으로 전체 체제에 의하여 규정된다.
체제의 비인간화로 ‘군중화’
오늘의 미국의 공항에서 많이 소멸한 것이, 체제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도 존재할 수 있는, 인간적인 배려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것은 군중화 현상 또는 더 물리적인 의미에서 공항의 규모가 흔히 말하는 ‘인간적 규모’를 넘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 사회 자체에서 일어난 변화도 여기에 관계되어 있다. 체제의 크기는-또는 단일화된 공간의 크기만도-비인간화를 낳는다. 오늘의 능률과 경비절약의 원리는 삶의 공간에 다른 고려가 들어 갈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거기에다가 국가 기구의 비대화는 모든 국지적인 섬세한 인간관계를 불가능하게 한다. 테러에 대한 전쟁이 선포된 후 국가는 거의 절대화된 힘이 되었다. 공항에서 여행자는 더없이 비인간화된 보안검사에 처하게 된다. 겨드랑이 밑으로부터 신발 아래까지 샅샅이 뒤지는 검사, 입국서류 심사 시의 지문 채취 등은 여행자를 완전히 객체화한다. 이러한 객체화가 공항의 문화로 전파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체제의 비인간화에 대한 원형은 미국 사회에 이미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1930년대의 작가 너대니얼 웨스트의 <메뚜기가 몰려오는 날>은 할리우드의 인생들을 그려내려고 한 작품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 군중 장면은 할리우드 그리고 미국 사회의 의미를 우화적으로 요약한다. 이 장면에서 영화의 개봉에 맞추어 출현한다는 실물 주연배우를 보기 위하여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러나 군중은 얼마 안 있어서 폭도로 변하게 된다. 그들은 할리우드가 조장하는 각종의 허황되고 속된 꿈으로 들떠 있으면서 동시에 마음에는 절망과 울분을 가득 담고 있다. 그들의 희망과 함께 실패를 말하여 주는 것이 이러한 꿈들이기 때문이다. 이 헛된 꿈들은 그들의 삶으로부터 구체적인 내용을 빼앗아 간다. 이것을 보상해주는 것이 집단 폭력이다. 웨스트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할리우드와 미국 사회에 대한 우화이면서 모든 소비주의 사회에 대한 우화이기도 하다. 거대해진 공항의 경험도, 대열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대중화되는 인간에 대한 우화에 관계된다 할 수 있다.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
입력 : 2009-07-15 18:08:55ㅣ수정 :
[김우창칼럼]두개의 청문회
검찰총장과 대법원판사 직은 다 같이 나라의 사법질서의 중심이 되는 자리이다. 최근 우리나라의 검찰총장 후보에 대한 국회 청문회와 미국의 대법원 판사(또는 대심원 판사) 후보 지명자의 청문회가 거의 같은 때에 열렸다.
우리 국회의 청문회에서 주로 문제가 된 것은 후보자의 전력인데, 초점은 공직자 윤리규범 면에서의 후보자의 자격요건이었다. 그리하여 드러난 것으로, 가볍다면 가벼운 것은 학교 배정과 관련해 거듭한 주민등록 가짜 전입 신고이고 조금 더 놀라운 것은 고가의 부동산 구입을 위하여 이용한 기이한 차금 방법이고, 가장 놀라운 것은 별로 큰 금액이 아닌지 모르지만 승용차 운행, 해외 골프 여행, 상품 구입에 스폰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들이다.
스폰서의 문제가 놀라운 것은 그것이 이 경우에 한정된 것이 아니고, 제도 전체에 만연된 ‘관행’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전관예우’와 함께, 나라 밖으로 알려진다면, 세계적인 웃음거리가 되기에 충분하다.) 검찰총장 후보 인사청문회에서 자격 요건이 논의된다면, 그것은 높은 자격 요건의 문제일 성 싶지만, 최소한의 자격 요건, 더 나아가 법적인 처리가 필요할 만한 결격 사항이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한국과 미국에서의 공직윤리
미국 의회에서도 대통령이 지명한 후보자의 청렴도가 문제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후보자가 부패 혐의를 받을 수 있는 인물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지명된 후보자는 자신의 재정 상태에 대한 진술서를 제출해야 한다.
그러나 그 사항은 서류의 제출로 끝나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예비 조사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청문회에서 이것이 문제되지 않는 것은 부패 혐의가 있는 인물이 법관으로 재직하고 있었다는 자체가 미국의 제도하에서 상상할 수도 없는 일로 생각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의 청문회에서 주제가 된 것은 법과 사법 절차에 대한 후보자 소니아 소토마요르 판사의 철학이었다. 이 논의에서 초점은, 그의 “현명한 라티나” 발언이었다. 수년 전 캘리포니아 대학 법학대학원의 강연에서, 더욱 공정한 법의 시행에는 많은 경험을 가진 법관, 가령 경험이 많은 “남미 혈통의 현명한 여성 법관”의 공헌이 중요하다고 한, 소토마요르 판사의 발언이 문제가 된 것이다.
우리 신문에도 보도된 바와 같이 소토마요르 판사는 남미 혈통의 여성으로서 최초로 대심원 판사 후보에 지명된 사람이다. 뉴욕의 빈민가에서 푸에르토리코 이민자의 딸로 자란 소토마요르는 프린스턴 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예일 대학 법학 대학원을 거쳐 사법계에 진출했다. “현명한 라티나” 발언은 이러한 배경과 관련하여 화제가 될 만한 것이었다. 소토마요르 후보는 이 발언을 소수 인종 출신의 학생들이 많이 참석한 강연회에서 그들을 격려하는 뜻으로 한 말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것을 문제 삼는 것은 인신공격-인종주의를 숨기고 하는 인신 공격처럼 보일 수도 있고, 또 사소한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는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를 삼으려 한다면, 법의 판결과 집행에 재판관의 개인 배경과 체험의 개입을 허용한다는 것이 되는데, 이것은 법의 공정성이라는 관점에서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또 이것은 사회와 정치 그리고 법의 큰 문제들에 이어지는 사안이다.
법은 구체적인 문제에 적용될 때에 일정한 해석을 거쳐서 하는 수밖에 없고, 개인적 편견의 배제를 당연한 것으로 해도 해석에는 전통, 판례, 사회 여론, 사회 이론, 외국의 법률 사례, 국가적 체면, 당사자들의 처지에 대한 공감적 이해 등등의 요소들이 개입될 수 있다. 어떤 입장은 법의 적용에 있어서 전통과 판례를 참조하는 외에 해석이 최소화되어야 한다고 하고 다른 입장은 변화해가는 사회 사정에 대한 고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사자들의 처지에 대한 인간적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적어도 미국의 형편에서는, 보수와 진보의 정치적 입장이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법률가 출신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헌법은 “살아 있는” 문서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하고, 일의 처리에서 “심정으로부터의” 인간적 이해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바 있다.
소토마요르 후보의 “현명한 라티나” 발언을 추궁한 것은 공화당 의원들이었다. 의도는 후보자의 진보적 성향을 부각시키고, 그러한 성향의 사람들이 법의 충실한 집행을 책임지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것으로 적극적인 방해를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한 공화당 의원은, 소수의 공화당이 지명 인준을 부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청문회를 국민적 계몽의 기회로 삼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공화당 의원들의 추궁에 답하여 소토마요르 후보는 법을 개인의 정치적 견해와 동정으로 해석하는 것을 지지하지 않으며, “있는 사실에 법을 적용하고” “법에 충실한 것”이 자기의 소신이라고 말했다. 그의 답변 과정에 정치적 발언이 있었다면, “평등의 실현에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정도가 그것이었다.
너무도 다른 청문의 풍경
미국의 신문에는 소토마요르의 답변이-그리고 질문들도-미국 사회의 중요한 문제들을 피해가는 것이라는 논평들이 있었다. 한국에서 보는 인상으로도 청문은 미적지근한 요식행위에 그쳤다는 감이 있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격정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성에 차는 면이 있기도 하지만, 그것을 요구하는 사회적 사정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결과 투쟁을 피하지 않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을 절차에 의하여 타협과 해결로 이끌어 가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소토마요르 대심원 판사 후보 청문회에도 미국 사회에 존재하는 중대한 갈등의 요인들이 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법률 해석의 문제 속에 숨겨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숨겨져 있지 않다고 해도 인사청문회는 사회의 큰 문제를 풀어 나가려는 자리가 아니다.
소토마요르 대심원 후보 청문회의 문답은 정중한 언어와 태도로 교환되었다. 청문회 후에 몇몇 공화당 의원은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소토마요르 후보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방청석에는 후보자의 부모, 조카들을 포함한 가족 일동이 앉아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지명이 가문의 영광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대심원 판사 후보 지명과 청문회를 포함한 미국의 정치제도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는 행위로도 간주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번에 우연히 일치하게 된 두 나라의 인사청문회는 두 나라의 차이를 다시 느끼게 한다. 한국과 미국은 역사와 전통이 다르고 당면한 사회적 과제가 다르다. 그 해결 방식이 같은 것일 수도 없다.
그러나 정치적 과제를 법률 절차로, 그리고 존중되는 사회 의식(儀式)으로 전환하는 일, 이것은 민주주의를 굳건히 하는 기본적 수순이다. 이것을 담당하는 공적 공간의 공적 기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 우리 사회이다. 더 기초적인 것은 공직의 윤리가 당연한 것이 되어 있는 사회 질서이다. 우리는 이러한 민주주의 토대로부터 아직은 상당히 멀리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
입력 : 2009-07-29 18:14:41ㅣ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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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 |
우리 국회의 청문회에서 주로 문제가 된 것은 후보자의 전력인데, 초점은 공직자 윤리규범 면에서의 후보자의 자격요건이었다. 그리하여 드러난 것으로, 가볍다면 가벼운 것은 학교 배정과 관련해 거듭한 주민등록 가짜 전입 신고이고 조금 더 놀라운 것은 고가의 부동산 구입을 위하여 이용한 기이한 차금 방법이고, 가장 놀라운 것은 별로 큰 금액이 아닌지 모르지만 승용차 운행, 해외 골프 여행, 상품 구입에 스폰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들이다.
스폰서의 문제가 놀라운 것은 그것이 이 경우에 한정된 것이 아니고, 제도 전체에 만연된 ‘관행’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전관예우’와 함께, 나라 밖으로 알려진다면, 세계적인 웃음거리가 되기에 충분하다.) 검찰총장 후보 인사청문회에서 자격 요건이 논의된다면, 그것은 높은 자격 요건의 문제일 성 싶지만, 최소한의 자격 요건, 더 나아가 법적인 처리가 필요할 만한 결격 사항이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한국과 미국에서의 공직윤리
미국 의회에서도 대통령이 지명한 후보자의 청렴도가 문제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후보자가 부패 혐의를 받을 수 있는 인물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지명된 후보자는 자신의 재정 상태에 대한 진술서를 제출해야 한다.
그러나 그 사항은 서류의 제출로 끝나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예비 조사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청문회에서 이것이 문제되지 않는 것은 부패 혐의가 있는 인물이 법관으로 재직하고 있었다는 자체가 미국의 제도하에서 상상할 수도 없는 일로 생각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의 청문회에서 주제가 된 것은 법과 사법 절차에 대한 후보자 소니아 소토마요르 판사의 철학이었다. 이 논의에서 초점은, 그의 “현명한 라티나” 발언이었다. 수년 전 캘리포니아 대학 법학대학원의 강연에서, 더욱 공정한 법의 시행에는 많은 경험을 가진 법관, 가령 경험이 많은 “남미 혈통의 현명한 여성 법관”의 공헌이 중요하다고 한, 소토마요르 판사의 발언이 문제가 된 것이다.
우리 신문에도 보도된 바와 같이 소토마요르 판사는 남미 혈통의 여성으로서 최초로 대심원 판사 후보에 지명된 사람이다. 뉴욕의 빈민가에서 푸에르토리코 이민자의 딸로 자란 소토마요르는 프린스턴 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예일 대학 법학 대학원을 거쳐 사법계에 진출했다. “현명한 라티나” 발언은 이러한 배경과 관련하여 화제가 될 만한 것이었다. 소토마요르 후보는 이 발언을 소수 인종 출신의 학생들이 많이 참석한 강연회에서 그들을 격려하는 뜻으로 한 말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것을 문제 삼는 것은 인신공격-인종주의를 숨기고 하는 인신 공격처럼 보일 수도 있고, 또 사소한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는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를 삼으려 한다면, 법의 판결과 집행에 재판관의 개인 배경과 체험의 개입을 허용한다는 것이 되는데, 이것은 법의 공정성이라는 관점에서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또 이것은 사회와 정치 그리고 법의 큰 문제들에 이어지는 사안이다.
법은 구체적인 문제에 적용될 때에 일정한 해석을 거쳐서 하는 수밖에 없고, 개인적 편견의 배제를 당연한 것으로 해도 해석에는 전통, 판례, 사회 여론, 사회 이론, 외국의 법률 사례, 국가적 체면, 당사자들의 처지에 대한 공감적 이해 등등의 요소들이 개입될 수 있다. 어떤 입장은 법의 적용에 있어서 전통과 판례를 참조하는 외에 해석이 최소화되어야 한다고 하고 다른 입장은 변화해가는 사회 사정에 대한 고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사자들의 처지에 대한 인간적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적어도 미국의 형편에서는, 보수와 진보의 정치적 입장이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법률가 출신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헌법은 “살아 있는” 문서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하고, 일의 처리에서 “심정으로부터의” 인간적 이해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바 있다.
소토마요르 후보의 “현명한 라티나” 발언을 추궁한 것은 공화당 의원들이었다. 의도는 후보자의 진보적 성향을 부각시키고, 그러한 성향의 사람들이 법의 충실한 집행을 책임지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것으로 적극적인 방해를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한 공화당 의원은, 소수의 공화당이 지명 인준을 부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청문회를 국민적 계몽의 기회로 삼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공화당 의원들의 추궁에 답하여 소토마요르 후보는 법을 개인의 정치적 견해와 동정으로 해석하는 것을 지지하지 않으며, “있는 사실에 법을 적용하고” “법에 충실한 것”이 자기의 소신이라고 말했다. 그의 답변 과정에 정치적 발언이 있었다면, “평등의 실현에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정도가 그것이었다.
너무도 다른 청문의 풍경
미국의 신문에는 소토마요르의 답변이-그리고 질문들도-미국 사회의 중요한 문제들을 피해가는 것이라는 논평들이 있었다. 한국에서 보는 인상으로도 청문은 미적지근한 요식행위에 그쳤다는 감이 있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격정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성에 차는 면이 있기도 하지만, 그것을 요구하는 사회적 사정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결과 투쟁을 피하지 않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을 절차에 의하여 타협과 해결로 이끌어 가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소토마요르 대심원 판사 후보 청문회에도 미국 사회에 존재하는 중대한 갈등의 요인들이 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법률 해석의 문제 속에 숨겨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숨겨져 있지 않다고 해도 인사청문회는 사회의 큰 문제를 풀어 나가려는 자리가 아니다.
소토마요르 대심원 후보 청문회의 문답은 정중한 언어와 태도로 교환되었다. 청문회 후에 몇몇 공화당 의원은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소토마요르 후보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방청석에는 후보자의 부모, 조카들을 포함한 가족 일동이 앉아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지명이 가문의 영광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대심원 판사 후보 지명과 청문회를 포함한 미국의 정치제도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는 행위로도 간주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번에 우연히 일치하게 된 두 나라의 인사청문회는 두 나라의 차이를 다시 느끼게 한다. 한국과 미국은 역사와 전통이 다르고 당면한 사회적 과제가 다르다. 그 해결 방식이 같은 것일 수도 없다.
그러나 정치적 과제를 법률 절차로, 그리고 존중되는 사회 의식(儀式)으로 전환하는 일, 이것은 민주주의를 굳건히 하는 기본적 수순이다. 이것을 담당하는 공적 공간의 공적 기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 우리 사회이다. 더 기초적인 것은 공직의 윤리가 당연한 것이 되어 있는 사회 질서이다. 우리는 이러한 민주주의 토대로부터 아직은 상당히 멀리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
입력 : 2009-07-29 18:14:41ㅣ수정 :
[김우창칼럼]좌, 우, 중도 좌, 중도 우…
입력 : 2009-08-12 18:15:48ㅣ수정 :
좌, 우, 중도, 중도 좌파, 중도 우파, 극좌, 극우…. 요즘의 정치 토론에서 끊임없이 듣게 되는 이러한 용어들의 뜻을 가려내기는 까다로운 수학 문제만큼이나 어렵다.
정치에 다른 의견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의견이 달라지는 것은 어떤 동기나 원인 때문인가? 정치는 권력을 쟁탈하는 것 이외에 다른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있다, 그 싸움에서는 아(我)와 피(彼)를 나누어 진영을 짜는 것이 필요하다. 의견의 차이가 개입한다면, 그것은 내편 네편을 구분하여 알아보는 표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의견이 개입되어야 한다는 것은 합리성의 필요를 느낀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공동의 공간을 상정한다. 좌우는 프랑스 혁명기 입법의회의 좌석 배치에서 나온 것으로, 의견과 이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면서도, 같은 자리에서 이야기를 할 수 있고 그 결과로 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좌와 우, 차이를 위한 차이인가
그러나 공동 공간이 요구하는 합리성의 기준을 받아들인다면, 편가름의 이해관계가 어떻게 되었든지, 정치적 의견이나 견해의 차이는 오늘의 사회와 정치 그리고 경제의 형편에 대한 일정한 판단에 기초해야 한다. 이 판단에서 중요한 것은 현실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다. 또 이와 함께 현실의 변형 가능성을 사실의 인과 관계에 따라 예측해야 한다. 정치가 주어진 사회의 삶을 바꾸려는 기획이라고 한다면, 사실에 대한 엄격한 이해와 판단은 정치가 져야 할 막중한 도의적 책임이 된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요즘 사용되는 좌우의 차이는 이러한 사실 분석보다는 차이를 위한 차이이고 권력의 전유를 위한 차이라는 인상을 준다. 정책이 이야기 될 때, 좌우를 가로질러 이야기되는 것을 보는 일이 별로 없는 데에서도 이것을 느낄 수 있다. 정책이 사실에 관계되는 것이라면, 인과 관계의 얽힘에 대한 이해가 언제나 좌우의 입장에 의하여 확연하게 갈라지는 것일 수는 없다.
현실의 전체 방향에 대한 합리적 이해에 있어서 더 미급한 인상을 주는 것은 요즘 상황에서 좌파로 생각된다. 옳든 그르든, 우파는 경제 성장 목표의 계속적인 추구가 한국사회의 나아갈 길이라는 테제로 받아들인다. 이에 대해 좌파는 앞으로의 경제가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데에 대한 뚜렷한 대안이 없다. 역사적으로 경제적 분석이 진보적 사회 이론의 핵심이었는데, 경제학이 없는 것이다. 사회 정책에 대한 강조는 확실하다. 그러나 경제성장주의라고 하여 이것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안정이 없는 경제 성장은 있을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 정책은 경제의 뒷받침이 없이는 현실 안에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사실 좌우 차이는 지금에 있어서 역점의 차이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 차이가 근본적일 수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도덕과 문화와 자연 환경-삶의 이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어야 하는 체제가 참으로 좋은 체제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다른 대안이 어떻게 제도화될 수 있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최근 프랑스의 좌파 사상가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한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사회주의는 죽었고, 사회당 당수 제1 서기 모브리는 ‘죽음의 집’을 지키는 사람에 불과하다고 말해 센세이션이 일었다. 그는 사회당 대통령 후보 세골렌 루아얄을 지지했기 때문에 새로 제1 서기가 된 마르틴 오브리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그의 극언들은 사회당의 무력(無力)에 대한 의미 있는 환멸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지난번 유럽연합 의회 선거에서 여러 나라 사회당들이 참패한 것도 같은 환멸감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공산주의의 별이 타고 있는 동안 반대든 찬성이든 다른 입장들이 별처럼 떠 있을 수 있었지만, 공산주의의 몰락은 사회주의를 포함하여 다른 모든 대안들을 무의미한 것이 되게 했다. 레비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고 유일한 현실로서의 자본주의를 그가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레비의 비판은 화려한 수사적 예언으로 끝난다. 마르크스는 역사가 인간보다도 상상력이 더 풍부하다고 했다. 역사의 변증법은 행동하는 인간들의 등 뒤에 새로운 역사의 아이를 탄생하게 한다. 그리고 이 아이, 즉 미래의 좌파는 이미 어딘가에서 태어났을 것이라고.
사실에 근거한 대안속에 미래가
그러나 현실적으로 자본주의는 바뀌어 간다고 할 수 있다. 얼마 전 미국 하원에서는, 특별한 조건하에서 회사 간부의 봉급을 제한하는 의안을 통과시켰다. 이것은 지난해부터 유럽에서도 논의가 되었던 방안이다. 이와는 다른 것이지만 독일에서는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자본주의를 수정하는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자동차제조업자 포르쉐와 폭스바겐이 위기 탈출의 한 방법으로 합병을 논의하는 사이에, 자동차 노조가 가입하고 있는 금속노동조합(IG Metall)은 자본, 운영, 이익 분배에 노동자가 참여하는 방안을 만들었다. 계획의 하나는 새로 성립하는 회사에서 노동자가 보상의 10% 정도를 주식으로 받는다는 것이다. (최종 타결은 2~3% 선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그 대신 노동자들은 임금을 그대로 두고 노동 시간을 연장하는 것을 수락할 것이다 노동자들의 대표가 이사회에 참석하는 공동결정 (Mitstimmung)의 제도도 이야기되고 있다. 이 과정에는 IG Metall의 대표도 참여하게 된다.
독일에서는 이미 700여개 기업에서 노동자의 경영, 이익분배, 주식 분배 등에 참여하는 제도가 도입되어 있다. 자동차 제조업체 다임러는 임금의 일부를 주(株)로 지불하기로 하고, 또 경영에 공동결정제를 도입했고, 오펠은 10%를 주식으로 지불하기로 결정했다. 중소기업인 유리창 제조 업체 조르페탈러 창들 제조회사는 20년 전에 20% 이상의 주를 근로자에게 돌아가게 했는데, 현재 60%의 종업원이 75%의 회사 자산을 소유하고 있다. 이 회사는 이번 경제위기에 바닥난 자본금 때문에 정부에 구조 신청을 해야 할 일이 없었다.
이러한 제도 변화에 대해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자본가들이 사유재산권의 손상을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종업원들의 공동 소유가 된 미국의 유나이티드 항공의 경우처럼, 공동운영 체제가 경영약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 노동자의 관점에서, 회사가 망하면, 그것은 직장과 임금과 재산을 한꺼번에 잃어버리는 것이 될 수 있다. 사회적 관점에서 말하건대, 노동자의 소유와 경영 참여는 노동 운동의 사회적 의미를 크게 줄어들게 한다. 특정 회사에 모인 노동자들의 이익 증대가 반드시 삶의 전반적인 사회화에 기여하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본주의적 정조(情調)의 제약 없는 확산을 의미할 수 있다.(레비가 ‘나쁜 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문화, 사생활, 개인의 심리-이러한 것들에까지 확산되는 시장원리다.)
그러나 정치에 필요한 것은 어떤 경우에나 사실을 단단하게 따라잡으려 하는 정치 경제학이다. 거기에서 고안되는 구체적인 대안들이 들고나는 사이에, 역사의 변증법에서 준비하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김우창|이화여대 석좌교수>
정치에 다른 의견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의견이 달라지는 것은 어떤 동기나 원인 때문인가? 정치는 권력을 쟁탈하는 것 이외에 다른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있다, 그 싸움에서는 아(我)와 피(彼)를 나누어 진영을 짜는 것이 필요하다. 의견의 차이가 개입한다면, 그것은 내편 네편을 구분하여 알아보는 표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의견이 개입되어야 한다는 것은 합리성의 필요를 느낀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공동의 공간을 상정한다. 좌우는 프랑스 혁명기 입법의회의 좌석 배치에서 나온 것으로, 의견과 이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면서도, 같은 자리에서 이야기를 할 수 있고 그 결과로 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좌와 우, 차이를 위한 차이인가
그러나 공동 공간이 요구하는 합리성의 기준을 받아들인다면, 편가름의 이해관계가 어떻게 되었든지, 정치적 의견이나 견해의 차이는 오늘의 사회와 정치 그리고 경제의 형편에 대한 일정한 판단에 기초해야 한다. 이 판단에서 중요한 것은 현실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다. 또 이와 함께 현실의 변형 가능성을 사실의 인과 관계에 따라 예측해야 한다. 정치가 주어진 사회의 삶을 바꾸려는 기획이라고 한다면, 사실에 대한 엄격한 이해와 판단은 정치가 져야 할 막중한 도의적 책임이 된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요즘 사용되는 좌우의 차이는 이러한 사실 분석보다는 차이를 위한 차이이고 권력의 전유를 위한 차이라는 인상을 준다. 정책이 이야기 될 때, 좌우를 가로질러 이야기되는 것을 보는 일이 별로 없는 데에서도 이것을 느낄 수 있다. 정책이 사실에 관계되는 것이라면, 인과 관계의 얽힘에 대한 이해가 언제나 좌우의 입장에 의하여 확연하게 갈라지는 것일 수는 없다.
현실의 전체 방향에 대한 합리적 이해에 있어서 더 미급한 인상을 주는 것은 요즘 상황에서 좌파로 생각된다. 옳든 그르든, 우파는 경제 성장 목표의 계속적인 추구가 한국사회의 나아갈 길이라는 테제로 받아들인다. 이에 대해 좌파는 앞으로의 경제가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데에 대한 뚜렷한 대안이 없다. 역사적으로 경제적 분석이 진보적 사회 이론의 핵심이었는데, 경제학이 없는 것이다. 사회 정책에 대한 강조는 확실하다. 그러나 경제성장주의라고 하여 이것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안정이 없는 경제 성장은 있을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 정책은 경제의 뒷받침이 없이는 현실 안에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사실 좌우 차이는 지금에 있어서 역점의 차이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 차이가 근본적일 수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도덕과 문화와 자연 환경-삶의 이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어야 하는 체제가 참으로 좋은 체제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다른 대안이 어떻게 제도화될 수 있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최근 프랑스의 좌파 사상가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한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사회주의는 죽었고, 사회당 당수 제1 서기 모브리는 ‘죽음의 집’을 지키는 사람에 불과하다고 말해 센세이션이 일었다. 그는 사회당 대통령 후보 세골렌 루아얄을 지지했기 때문에 새로 제1 서기가 된 마르틴 오브리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그의 극언들은 사회당의 무력(無力)에 대한 의미 있는 환멸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지난번 유럽연합 의회 선거에서 여러 나라 사회당들이 참패한 것도 같은 환멸감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공산주의의 별이 타고 있는 동안 반대든 찬성이든 다른 입장들이 별처럼 떠 있을 수 있었지만, 공산주의의 몰락은 사회주의를 포함하여 다른 모든 대안들을 무의미한 것이 되게 했다. 레비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고 유일한 현실로서의 자본주의를 그가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레비의 비판은 화려한 수사적 예언으로 끝난다. 마르크스는 역사가 인간보다도 상상력이 더 풍부하다고 했다. 역사의 변증법은 행동하는 인간들의 등 뒤에 새로운 역사의 아이를 탄생하게 한다. 그리고 이 아이, 즉 미래의 좌파는 이미 어딘가에서 태어났을 것이라고.
사실에 근거한 대안속에 미래가
그러나 현실적으로 자본주의는 바뀌어 간다고 할 수 있다. 얼마 전 미국 하원에서는, 특별한 조건하에서 회사 간부의 봉급을 제한하는 의안을 통과시켰다. 이것은 지난해부터 유럽에서도 논의가 되었던 방안이다. 이와는 다른 것이지만 독일에서는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자본주의를 수정하는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자동차제조업자 포르쉐와 폭스바겐이 위기 탈출의 한 방법으로 합병을 논의하는 사이에, 자동차 노조가 가입하고 있는 금속노동조합(IG Metall)은 자본, 운영, 이익 분배에 노동자가 참여하는 방안을 만들었다. 계획의 하나는 새로 성립하는 회사에서 노동자가 보상의 10% 정도를 주식으로 받는다는 것이다. (최종 타결은 2~3% 선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그 대신 노동자들은 임금을 그대로 두고 노동 시간을 연장하는 것을 수락할 것이다 노동자들의 대표가 이사회에 참석하는 공동결정 (Mitstimmung)의 제도도 이야기되고 있다. 이 과정에는 IG Metall의 대표도 참여하게 된다.
독일에서는 이미 700여개 기업에서 노동자의 경영, 이익분배, 주식 분배 등에 참여하는 제도가 도입되어 있다. 자동차 제조업체 다임러는 임금의 일부를 주(株)로 지불하기로 하고, 또 경영에 공동결정제를 도입했고, 오펠은 10%를 주식으로 지불하기로 결정했다. 중소기업인 유리창 제조 업체 조르페탈러 창들 제조회사는 20년 전에 20% 이상의 주를 근로자에게 돌아가게 했는데, 현재 60%의 종업원이 75%의 회사 자산을 소유하고 있다. 이 회사는 이번 경제위기에 바닥난 자본금 때문에 정부에 구조 신청을 해야 할 일이 없었다.
이러한 제도 변화에 대해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자본가들이 사유재산권의 손상을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종업원들의 공동 소유가 된 미국의 유나이티드 항공의 경우처럼, 공동운영 체제가 경영약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 노동자의 관점에서, 회사가 망하면, 그것은 직장과 임금과 재산을 한꺼번에 잃어버리는 것이 될 수 있다. 사회적 관점에서 말하건대, 노동자의 소유와 경영 참여는 노동 운동의 사회적 의미를 크게 줄어들게 한다. 특정 회사에 모인 노동자들의 이익 증대가 반드시 삶의 전반적인 사회화에 기여하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본주의적 정조(情調)의 제약 없는 확산을 의미할 수 있다.(레비가 ‘나쁜 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문화, 사생활, 개인의 심리-이러한 것들에까지 확산되는 시장원리다.)
그러나 정치에 필요한 것은 어떤 경우에나 사실을 단단하게 따라잡으려 하는 정치 경제학이다. 거기에서 고안되는 구체적인 대안들이 들고나는 사이에, 역사의 변증법에서 준비하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김우창|이화여대 석좌교수>
입력 : 2009-08-12 18:15:48ㅣ수정 :
[김우창칼럼]‘경영학석사 선서’
입력 : 2009-08-26 17:57:31ㅣ수정 :
최근 외국에서 전해오는 작은 뉴스 하나는 미국 하버드 대학 경영대학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졸업생의 반 이상이 ‘경영학석사 선서 (The MBA Oath)’라는 것에 서명하고 졸업했다는 것이다. 이 선서의 원형이 된 것은 의과 졸업생들의 히포크라테스 선서이다. 의과 졸업생들이 히포크라테스 선서에서 의사로서의 윤리적 의무를 다할 것을 선서하듯이, 경영대학원 졸업생들도 기업 활동에 있어서 윤리 규범의 준수를 선서하는 것이다.
기업활동의 도덕적 의무 다짐
이번 선서는 졸업 예정자 한 사람의 발상이었지만, 900여명의 졸업생 중 반 이상이 이 선서에 동참했다. 그리고 다른 경영대학원 졸업생 사이에도 동참자가 확산되어 올 여름의 경영대학 졸업생들 1400여명이 선서문에 서명했다고 전한다. 졸업생 전원이 참여하지 않은 것은 이것이 강요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유의사를 존중하는 사회 풍토에서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선서자들의 선서가 대중적 압력 때문이 아니라 각자가 생각해본 다음에 취한 결정임을 말해 준다고 할 수 있다.
경영이란 인간활동을 윤리의 관점에서 정의한다는 것은 그 본질을 잘못 파악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는 일이다. 사업을 경영한다는 것은 돈 버는 일을 한다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개인적 동기의 관점에서도 말할 수 있지만, 사회적으로 일반화되어 있는 공리(公理)이다. 이윤의 추구와 극대화는 경영의 실제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경영학과 경제학의 기본 가설이다. 이윤의 동기가 인간의 모든 것을 다 포용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그것은 경제활동을 사실적 인과관계 속에서 분석하고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방법론적 가설이다. 그러면서 그것은 사람이 이 관계 속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강하게 인식하게 한다. 그리하여 오늘의 경제 체제를 긍정적으로 보든 부정적으로 보든, 경제를 생각할 때에는 오로지 경제의 관점에서 - 체제 전체로서, 직시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아니할 수 없게 한다. 이에 대하여 하버드 대학생들의 선서는 작은 사건이면서, 조금은 다른 가능성들을 생각하게 한다.
“경영자로서 나의 목적은 인간과 자원을 결합하여 개인이 만들어 낼 수 없는 가치를 창조함으로써 더 큰 선(善)에 봉사하는 것이다.” 선서의 첫머리는 기업활동을 이와 같이 정의한다. 소극적으로 생각하는 경우에도 기업인은 자기의 결정이 회사의 안과 밖에 중요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해야 한다. 행동 규칙은 그 활동의 사회적, 윤리적 성격에서 저절로 도출된다. 기업인의 활동은 도덕적 엄격성, 윤리적 태도에 입각한 것이어야 하고, 책임감·정직성·정확성 등의 기준을 엄수하는 것이어야 한다. 기업인이 추구해야 할 것은 ‘개인의 좁은 야심’이 아니라, ‘주주·동료 근로자·소비자·사회의 이익이고, 더 크게는 세계적으로 지속가능한 경제·사회·환경의 변영’이다.
이러한 내용의 경영대학원 졸업생들의 선서는 환영할 만한 것이라 하더라도, 문제는 이러한 선서의 현실적 효과다. 의술의 목적은 병든 사람의 치료다. 그러나 의료업도 그에 종사하는 사람의 생업이라는 측면이 있다. 요즘 와서는 의술의 목적이 병의 치료보다는 돈에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면서도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무의미하지는 않다. 그것은 그 나름으로 의술 행위의 지침이 된다. 다만 의술은 그 본질이 인술(仁術)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그러한 측면은 의술 행위의 모든 단계에서 즉각적으로 점검된다. 그와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경영 행위에 경영학도의 윤리 선서가 똑같은 효과를 가질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의미 없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 대로 그것은 경영인의 마음 속에서 처신의 한 준거가 될 수 있다. 지금 기업과 사회 윤리의 관계는 어느 때보다도 매서운 검증의 대상이 되어 있다. 따라서 선서에서 밝혀진 윤리 강령은 오늘의 현실에서 하나의 힘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구미 여러 나라에서 국가보조를 받은 금융업체와 거대 기업들이 다시 거액의 보너스를 지급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국민과 정부의 반발에 부딪히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최근 그 대표적인 표현은 영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움직임이다. 논의를 자극한 것은 콤파스(Compass)라는 단체에서 내놓은 ‘고보수위원회(High Pay Commission)’ 설치 제안이다. 이것은 최저임금 보장을 위한 공공정책 기구인 ‘저보수위원회(Low Pay Commission)’에 맞먹는, 고액 보수 관할 기구를 제안하는 것이다. 목적은 최근 경제 위기의 원인이 되었던 금융기관의 과도한 고액 보수는 물론 보수(報酬) 체제 전반의 사회적 불균형을 바로잡자는 것이다. 오늘날 영국 100대 기업의 최고경영자의 연간 소득 평균은 주 40시간 노동의 최저 임금 근로자의 226년간의 임금에 해당한다. 정부는 산하 공공 기구의 예산 집행이나 보수 체계에서 도덕적 모범이 되어야 한다. 고보수위원회는 보수 비율의 조정, 보너스 세금제 등과 같은 구체적 정책과 시행 방안을 경국하여 보수체제를 조정하고, 궁극적으로 ‘모든 국민을 위하여 더욱 지속가능하고, 평등하고, 안정된 경제적 미래를 보장하는 현실 변화’를 가져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러한 제안을 내놓은 콤파스는 좌파 민주주의를 표방한다. 그러나 콤파스의 제안은 노동조합, 학계, 그리고 노동당, 자유민주당, 보수당 등 당파를 초월하여 역점과 열도의 차이는 있지만 넓은 호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현 집권당 노동당에 대하여 야당의 입장에 있는 보수당의 재무상 후보 조지 오스본이 이 제안에 반응하여 거액의 보너스에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과 같은 것은 그 초당적 호소력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되풀이 하건대, 이번의 금융경제 위기는 정치와 경제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자극했다. 물론 구미의 여러 나라들에서 나오는 새로운 생각과 방안들이 사정이 다를 수밖에 없는 한국에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다. 그러나 위기에 대처하는 여러 방안들은 우리 사정을 생각하는 데에도 참고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윤리 경영’ 정착에 도움 될 것
국제 정치를 힘의 대결이라는 관점에서만 보려는 국제 정치론이 있다. 이에 대하여 근년에는 연성(軟性)의 힘, 소프트파워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관점들이 등장했다. 경제는 경제의 법칙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그것을 더 크게 테두리 짓고 있는 것은 사회 윤리이다. 그리고 이것은 반드시 경제와 별개의 것으로 현실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서두에서 말한 하버드 경영학석사 선서에 표현된 윤리 의식은 사람 본성의 깊이에 들어 있는 요구이다. 새로운 역사의 전환점에서 그것이 새로 부상하고 확인되었을 뿐이다. 사회 전체에 대한 공동체적이고 윤리적인 고려는 인간사의 모든 면에서 소프트파워로 작용한다. 경제를 경제로만 보거나 모든 것을 힘의 대결이라는 관점에서만 보는 게 우리의 정치 판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적인 요구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북돋는 것이, 참으로 살 만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중요한 힘을 살려내는 일이다.
<김우창 | 이화여대 석좌교수>
기업활동의 도덕적 의무 다짐
이번 선서는 졸업 예정자 한 사람의 발상이었지만, 900여명의 졸업생 중 반 이상이 이 선서에 동참했다. 그리고 다른 경영대학원 졸업생 사이에도 동참자가 확산되어 올 여름의 경영대학 졸업생들 1400여명이 선서문에 서명했다고 전한다. 졸업생 전원이 참여하지 않은 것은 이것이 강요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유의사를 존중하는 사회 풍토에서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선서자들의 선서가 대중적 압력 때문이 아니라 각자가 생각해본 다음에 취한 결정임을 말해 준다고 할 수 있다.
경영이란 인간활동을 윤리의 관점에서 정의한다는 것은 그 본질을 잘못 파악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는 일이다. 사업을 경영한다는 것은 돈 버는 일을 한다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개인적 동기의 관점에서도 말할 수 있지만, 사회적으로 일반화되어 있는 공리(公理)이다. 이윤의 추구와 극대화는 경영의 실제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경영학과 경제학의 기본 가설이다. 이윤의 동기가 인간의 모든 것을 다 포용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그것은 경제활동을 사실적 인과관계 속에서 분석하고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방법론적 가설이다. 그러면서 그것은 사람이 이 관계 속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강하게 인식하게 한다. 그리하여 오늘의 경제 체제를 긍정적으로 보든 부정적으로 보든, 경제를 생각할 때에는 오로지 경제의 관점에서 - 체제 전체로서, 직시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아니할 수 없게 한다. 이에 대하여 하버드 대학생들의 선서는 작은 사건이면서, 조금은 다른 가능성들을 생각하게 한다.
“경영자로서 나의 목적은 인간과 자원을 결합하여 개인이 만들어 낼 수 없는 가치를 창조함으로써 더 큰 선(善)에 봉사하는 것이다.” 선서의 첫머리는 기업활동을 이와 같이 정의한다. 소극적으로 생각하는 경우에도 기업인은 자기의 결정이 회사의 안과 밖에 중요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해야 한다. 행동 규칙은 그 활동의 사회적, 윤리적 성격에서 저절로 도출된다. 기업인의 활동은 도덕적 엄격성, 윤리적 태도에 입각한 것이어야 하고, 책임감·정직성·정확성 등의 기준을 엄수하는 것이어야 한다. 기업인이 추구해야 할 것은 ‘개인의 좁은 야심’이 아니라, ‘주주·동료 근로자·소비자·사회의 이익이고, 더 크게는 세계적으로 지속가능한 경제·사회·환경의 변영’이다.
이러한 내용의 경영대학원 졸업생들의 선서는 환영할 만한 것이라 하더라도, 문제는 이러한 선서의 현실적 효과다. 의술의 목적은 병든 사람의 치료다. 그러나 의료업도 그에 종사하는 사람의 생업이라는 측면이 있다. 요즘 와서는 의술의 목적이 병의 치료보다는 돈에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면서도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무의미하지는 않다. 그것은 그 나름으로 의술 행위의 지침이 된다. 다만 의술은 그 본질이 인술(仁術)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그러한 측면은 의술 행위의 모든 단계에서 즉각적으로 점검된다. 그와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경영 행위에 경영학도의 윤리 선서가 똑같은 효과를 가질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의미 없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 대로 그것은 경영인의 마음 속에서 처신의 한 준거가 될 수 있다. 지금 기업과 사회 윤리의 관계는 어느 때보다도 매서운 검증의 대상이 되어 있다. 따라서 선서에서 밝혀진 윤리 강령은 오늘의 현실에서 하나의 힘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구미 여러 나라에서 국가보조를 받은 금융업체와 거대 기업들이 다시 거액의 보너스를 지급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국민과 정부의 반발에 부딪히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최근 그 대표적인 표현은 영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움직임이다. 논의를 자극한 것은 콤파스(Compass)라는 단체에서 내놓은 ‘고보수위원회(High Pay Commission)’ 설치 제안이다. 이것은 최저임금 보장을 위한 공공정책 기구인 ‘저보수위원회(Low Pay Commission)’에 맞먹는, 고액 보수 관할 기구를 제안하는 것이다. 목적은 최근 경제 위기의 원인이 되었던 금융기관의 과도한 고액 보수는 물론 보수(報酬) 체제 전반의 사회적 불균형을 바로잡자는 것이다. 오늘날 영국 100대 기업의 최고경영자의 연간 소득 평균은 주 40시간 노동의 최저 임금 근로자의 226년간의 임금에 해당한다. 정부는 산하 공공 기구의 예산 집행이나 보수 체계에서 도덕적 모범이 되어야 한다. 고보수위원회는 보수 비율의 조정, 보너스 세금제 등과 같은 구체적 정책과 시행 방안을 경국하여 보수체제를 조정하고, 궁극적으로 ‘모든 국민을 위하여 더욱 지속가능하고, 평등하고, 안정된 경제적 미래를 보장하는 현실 변화’를 가져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러한 제안을 내놓은 콤파스는 좌파 민주주의를 표방한다. 그러나 콤파스의 제안은 노동조합, 학계, 그리고 노동당, 자유민주당, 보수당 등 당파를 초월하여 역점과 열도의 차이는 있지만 넓은 호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현 집권당 노동당에 대하여 야당의 입장에 있는 보수당의 재무상 후보 조지 오스본이 이 제안에 반응하여 거액의 보너스에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과 같은 것은 그 초당적 호소력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되풀이 하건대, 이번의 금융경제 위기는 정치와 경제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자극했다. 물론 구미의 여러 나라들에서 나오는 새로운 생각과 방안들이 사정이 다를 수밖에 없는 한국에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다. 그러나 위기에 대처하는 여러 방안들은 우리 사정을 생각하는 데에도 참고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윤리 경영’ 정착에 도움 될 것
국제 정치를 힘의 대결이라는 관점에서만 보려는 국제 정치론이 있다. 이에 대하여 근년에는 연성(軟性)의 힘, 소프트파워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관점들이 등장했다. 경제는 경제의 법칙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그것을 더 크게 테두리 짓고 있는 것은 사회 윤리이다. 그리고 이것은 반드시 경제와 별개의 것으로 현실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서두에서 말한 하버드 경영학석사 선서에 표현된 윤리 의식은 사람 본성의 깊이에 들어 있는 요구이다. 새로운 역사의 전환점에서 그것이 새로 부상하고 확인되었을 뿐이다. 사회 전체에 대한 공동체적이고 윤리적인 고려는 인간사의 모든 면에서 소프트파워로 작용한다. 경제를 경제로만 보거나 모든 것을 힘의 대결이라는 관점에서만 보는 게 우리의 정치 판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적인 요구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북돋는 것이, 참으로 살 만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중요한 힘을 살려내는 일이다.
<김우창 | 이화여대 석좌교수>
입력 : 2009-08-26 17:57:31ㅣ수정 :
[김우창칼럼]숲이 우거진 언덕에 머무는 꾀꼬리
입력 : 2009-09-09 17:57:04ㅣ수정 :
민생안정이란 말은 동양에서 정치의 근본을 설명하는 데 가장 많이 쓰이는 낱말일 것이다. 반드시 이 말이 사용되지 않는 경우에도 백성의 삶의 안정이 모든 정치적 과제의 핵심이라는 것은 제자백가의 시대에 시작하여 오늘날까지도 되풀이되는 정치 명제다. 민생안정이란 경제, 정치, 풍속, 정신의 안정 - 사람이 사는 데에 필요한 삶의 질서의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러면서 그것은 구체적인 것에 근거해야 한다. 이 구체적인 것이 더 크고 추상적인 의미에서의 정치질서와 삶의 질서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한자 성어에 안거낙업(安居樂業)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백성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큰 정치나 재리의 계략보다 편안하게 거주하면서 생업에 즐겁게 종사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원전을 보면, 여기의 ‘거주한다’는 말의 앞뒤 맥락에는 음식과 의복이 나온다. 그것으로 미루어, 거주는 더 구체적으로는 인간 생활의 기본 조건으로서의 의식주(衣食住)의 주 - 즉 집을 말한다고 좁혀서 생각할 수 있다.
민생안정의 기본인 ‘주거·생업’
삶의 기본조건 가운데 주거 문제는 다른 조건들에 비하여 긴급성이 덜한 것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 당장에 먹고 마시는 것이 급하고, 다른 한편으로, 추위에 체온을 유지하는 일, 그리고 사람이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수치심을 생각하면, 의복은 조금 더 긴급한 요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집은 사람의 삶에서 의식(衣食)의 긴급성과는 다른, 그러나 어쩌면 더 근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생명 유지의 긴급성을 넘어선 다음, 사람은 그 문제를 조금 더 넓고 지속적인 관점에서 해결할 수 있는 조건을 찾는다. 이것은 사람의 본능에 속한다. 이 조건의 하나는 안주(安住)의 중심으로서의 집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삶의 여러 조건들을 지속적인 것이 되게 할 수 있는 생업이다. 사람이 사는 것은 한순간이나 하루가 아니다. 일생을 안정되게 살지는 못할지라도 한동안은 지속적인 삶을 살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삶이 안정감을 주는 물리적 사회적 환경 속에서 지속되기를 기대한다. 그 중심이 주거 그리고 생업이다. 이러한 기대를 꿰뚫고 있는 것은, 달리 말하면, 인간 생존의 원초적 축을 이루는 시간과 공간이다. 공간과 시간의 안정은 추상적이면서도 아주 구체적인 인간 실존의 요구이다. 안거낙업은 먹고 사는 일의 기본 조건을 이 기본축의 좌표에 맞추어서 요약한다.
정부는 민생안정을 그 기본 시책의 지침으로 삼으면서, 반값 주택을 공급하겠다고 한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안거낙업은 민생안정의 기본이고 전통사상에서나 오늘날에나 변함 없는 사람의 삶의 기본이다. 반값의 집을 공급하는 것은 서민생활의 기초를 닦는 일이다. 그러나 이 반값 아파트에 대하여 회의와 우려를 표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정치에서 좋은 의도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지금까지의 주택 건설, 그리고 국토 개발 경과이다. 우려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우려의 하나는 새 아파트 기획이 다시 부동산 가격을 높이고 투기를 불러올지 모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환경 훼손이다. 대책을 마련하기는 할 것이다. 정부는 세금 인상, 전매 금지 등 기타 규제를 통하여 투기를 방지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주택이 부동산이 되고, 동산이 되고, 재산 증식의 방편이 된 세상에서 단기적으로는 몰라도 장기적으로 이것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새 아파트의 가격 억제는 다른 주택과의 가격 불균형으로 인하여 새 아파트 지역을 빈민가로 떨어지게 할 가능성이 있다. 아파트 건축에 선행하여 해제하게 될 그린벨트의 문제는 이미 환경 단체의 반대에 부딪히고 있다. 정부는 해제될 그린벨트는 이미 그린벨트로서의 의미를 상실한 지역을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주장은 엄격한 조사에 의하여 뒷받침되는 것이라야 할 것이다.
이 이외에도 대처해야 할 문제들이 많을 것이나, 여기에 대하여 필자는 좋은 제안을 할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다만 환경과 관련해서, 새로운 아파트가 참으로 환경친화적인 것이 되기를 바란다는 희망을 표현하고 싶을 뿐이다. 환경친화적 건축과 개발에는 녹지대 보존 이상의 연구가 있어야 한다. 새로 짓는 아파트를 여러 의미에서 모범적 건축이 되게 하는 데에는, 환경 의식이 높아지고 있는 지금에는 참조할 만한 것이 많을 것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인공 에너지의 사용 없이 사계절 동안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파시프하우스(passivhaus)’라고 불리는 녹색 건축이 개발되고 있다. 또 달리는 실내 디자인에 식수(植樹) 공간을 도입하여 쾌적한 작업과 생활의 환경을 조성하는 설계 등도 시험되고 있다. (미국에서 그렇게 설계된 공장에서는 생산성이 높아지고 이직률이 떨어진다는 보고가 있다.) 물론 이러한 녹색 건축기술이 어떻게 저렴하게 적용될 수 있는가는 새로이 연구되어야 할 과제일 것이다.
세심한 배려 필요한 ‘반값 주택’
직접적으로 기술적인 문제를 떠나서 중요한 것은 새로 지을 아파트들이 동네 또는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도록 설계되는 것이다. 공동체란 생업, 교육, 보건, 일상적 필요의 해결, 사회 관계 등 여러 기능으로 구성된다. 이것들을 위한 시설에 대한 고려는 공동체 성립의 가장 중요한 준비가 될 것이다. 주거들의 공간적 구조, 그것만으로도 공동체의 활성화에 큰 역할을 한다. 원인을 다 밝혀내는 것은 얽히고 설킨 사회적 회로를 풀어내는 일이 되겠지만, 안정된 주거가 부동산 시장의 상품이 되는 것은 주민이 자신의 주거와 동네에 대한 사랑 또는 친화감을 발전시키지 못한다는 사실과 관계되어 있다. 상품 시장을 넘어서 삶의 안정을 생각한다면, 다시 한 번, 주거가 삶의 터전이라는 상식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이때 주거란 집을 넘어 삶이 뿌리 내려야 하는 크고 작은 환경, 그리고 땅 전체와의 유기적 일체성을 의미한다.
위에서 우리는 안거가 생존의 기본 축으로서의 공간에 이어져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지극히 유기적 성격을 가진 공간이다. <대학(大學)>에는 사회윤리를 국토와 주민의 친화에 묶어서 말하는 부분이 있다. 나라의 모든 것이 선(善)에 바탕해야 한다는 ‘지지선(止至善)’이라는 항목은 <시경(詩經)>에서 시구 둘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나는, ‘경기(京畿)의 땅 천리여, 백성이 머무는 곳이로세’이고 그 다음 것은, ‘지저귀는 꾀꼬리여, 언덕 우거진 숲에 머물렀구나’이다. 공자는 이 둘을 하나로 하여, 사람도 “머무름에 있어 그 머무르는 곳을 아나니, 사람으로서 어찌 새만도 못할 수 있겠는가”라고 평한다. 사람이 정치와 국토에 안주하는 것은 마치 꾀꼬리가 숲이 있는 언덕에 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친화감이 있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부분의 제1차적인 의도는 선정(善政)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감추어져 있는 뜻은 자연과 땅과 윤리가 모두 하나가 되어야 좋은 정치가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서민의 거주를 위한 아파트 건축에 지나치게 거창한 기대를 걸 수는 없지만, 이제 주택 건설, 국토 개발에 있어 존재의 깊은 이치 그러면서 당연한 상식을 사회에 되돌려 놓아야 할 것을 연구해야 하는 때가 되지 않았나 한다.
<김우창|이화여대 석좌교수>
한자 성어에 안거낙업(安居樂業)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백성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큰 정치나 재리의 계략보다 편안하게 거주하면서 생업에 즐겁게 종사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원전을 보면, 여기의 ‘거주한다’는 말의 앞뒤 맥락에는 음식과 의복이 나온다. 그것으로 미루어, 거주는 더 구체적으로는 인간 생활의 기본 조건으로서의 의식주(衣食住)의 주 - 즉 집을 말한다고 좁혀서 생각할 수 있다.
민생안정의 기본인 ‘주거·생업’
삶의 기본조건 가운데 주거 문제는 다른 조건들에 비하여 긴급성이 덜한 것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 당장에 먹고 마시는 것이 급하고, 다른 한편으로, 추위에 체온을 유지하는 일, 그리고 사람이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수치심을 생각하면, 의복은 조금 더 긴급한 요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집은 사람의 삶에서 의식(衣食)의 긴급성과는 다른, 그러나 어쩌면 더 근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생명 유지의 긴급성을 넘어선 다음, 사람은 그 문제를 조금 더 넓고 지속적인 관점에서 해결할 수 있는 조건을 찾는다. 이것은 사람의 본능에 속한다. 이 조건의 하나는 안주(安住)의 중심으로서의 집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삶의 여러 조건들을 지속적인 것이 되게 할 수 있는 생업이다. 사람이 사는 것은 한순간이나 하루가 아니다. 일생을 안정되게 살지는 못할지라도 한동안은 지속적인 삶을 살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삶이 안정감을 주는 물리적 사회적 환경 속에서 지속되기를 기대한다. 그 중심이 주거 그리고 생업이다. 이러한 기대를 꿰뚫고 있는 것은, 달리 말하면, 인간 생존의 원초적 축을 이루는 시간과 공간이다. 공간과 시간의 안정은 추상적이면서도 아주 구체적인 인간 실존의 요구이다. 안거낙업은 먹고 사는 일의 기본 조건을 이 기본축의 좌표에 맞추어서 요약한다.
정부는 민생안정을 그 기본 시책의 지침으로 삼으면서, 반값 주택을 공급하겠다고 한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안거낙업은 민생안정의 기본이고 전통사상에서나 오늘날에나 변함 없는 사람의 삶의 기본이다. 반값의 집을 공급하는 것은 서민생활의 기초를 닦는 일이다. 그러나 이 반값 아파트에 대하여 회의와 우려를 표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정치에서 좋은 의도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지금까지의 주택 건설, 그리고 국토 개발 경과이다. 우려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우려의 하나는 새 아파트 기획이 다시 부동산 가격을 높이고 투기를 불러올지 모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환경 훼손이다. 대책을 마련하기는 할 것이다. 정부는 세금 인상, 전매 금지 등 기타 규제를 통하여 투기를 방지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주택이 부동산이 되고, 동산이 되고, 재산 증식의 방편이 된 세상에서 단기적으로는 몰라도 장기적으로 이것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새 아파트의 가격 억제는 다른 주택과의 가격 불균형으로 인하여 새 아파트 지역을 빈민가로 떨어지게 할 가능성이 있다. 아파트 건축에 선행하여 해제하게 될 그린벨트의 문제는 이미 환경 단체의 반대에 부딪히고 있다. 정부는 해제될 그린벨트는 이미 그린벨트로서의 의미를 상실한 지역을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주장은 엄격한 조사에 의하여 뒷받침되는 것이라야 할 것이다.
이 이외에도 대처해야 할 문제들이 많을 것이나, 여기에 대하여 필자는 좋은 제안을 할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다만 환경과 관련해서, 새로운 아파트가 참으로 환경친화적인 것이 되기를 바란다는 희망을 표현하고 싶을 뿐이다. 환경친화적 건축과 개발에는 녹지대 보존 이상의 연구가 있어야 한다. 새로 짓는 아파트를 여러 의미에서 모범적 건축이 되게 하는 데에는, 환경 의식이 높아지고 있는 지금에는 참조할 만한 것이 많을 것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인공 에너지의 사용 없이 사계절 동안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파시프하우스(passivhaus)’라고 불리는 녹색 건축이 개발되고 있다. 또 달리는 실내 디자인에 식수(植樹) 공간을 도입하여 쾌적한 작업과 생활의 환경을 조성하는 설계 등도 시험되고 있다. (미국에서 그렇게 설계된 공장에서는 생산성이 높아지고 이직률이 떨어진다는 보고가 있다.) 물론 이러한 녹색 건축기술이 어떻게 저렴하게 적용될 수 있는가는 새로이 연구되어야 할 과제일 것이다.
세심한 배려 필요한 ‘반값 주택’
직접적으로 기술적인 문제를 떠나서 중요한 것은 새로 지을 아파트들이 동네 또는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도록 설계되는 것이다. 공동체란 생업, 교육, 보건, 일상적 필요의 해결, 사회 관계 등 여러 기능으로 구성된다. 이것들을 위한 시설에 대한 고려는 공동체 성립의 가장 중요한 준비가 될 것이다. 주거들의 공간적 구조, 그것만으로도 공동체의 활성화에 큰 역할을 한다. 원인을 다 밝혀내는 것은 얽히고 설킨 사회적 회로를 풀어내는 일이 되겠지만, 안정된 주거가 부동산 시장의 상품이 되는 것은 주민이 자신의 주거와 동네에 대한 사랑 또는 친화감을 발전시키지 못한다는 사실과 관계되어 있다. 상품 시장을 넘어서 삶의 안정을 생각한다면, 다시 한 번, 주거가 삶의 터전이라는 상식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이때 주거란 집을 넘어 삶이 뿌리 내려야 하는 크고 작은 환경, 그리고 땅 전체와의 유기적 일체성을 의미한다.
위에서 우리는 안거가 생존의 기본 축으로서의 공간에 이어져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지극히 유기적 성격을 가진 공간이다. <대학(大學)>에는 사회윤리를 국토와 주민의 친화에 묶어서 말하는 부분이 있다. 나라의 모든 것이 선(善)에 바탕해야 한다는 ‘지지선(止至善)’이라는 항목은 <시경(詩經)>에서 시구 둘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나는, ‘경기(京畿)의 땅 천리여, 백성이 머무는 곳이로세’이고 그 다음 것은, ‘지저귀는 꾀꼬리여, 언덕 우거진 숲에 머물렀구나’이다. 공자는 이 둘을 하나로 하여, 사람도 “머무름에 있어 그 머무르는 곳을 아나니, 사람으로서 어찌 새만도 못할 수 있겠는가”라고 평한다. 사람이 정치와 국토에 안주하는 것은 마치 꾀꼬리가 숲이 있는 언덕에 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친화감이 있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부분의 제1차적인 의도는 선정(善政)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감추어져 있는 뜻은 자연과 땅과 윤리가 모두 하나가 되어야 좋은 정치가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서민의 거주를 위한 아파트 건축에 지나치게 거창한 기대를 걸 수는 없지만, 이제 주택 건설, 국토 개발에 있어 존재의 깊은 이치 그러면서 당연한 상식을 사회에 되돌려 놓아야 할 것을 연구해야 하는 때가 되지 않았나 한다.
<김우창|이화여대 석좌교수>
입력 : 2009-09-09 17:57:04ㅣ수정 :
김우창칼럼]통일과 이성적 정치문화
올해는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진 지 20년이 되는 해이고 11월9일은 그 기념일이다. 이와 관련하여 얼마 전 고려대학교 평화연구소에서는 ‘베를린 장벽 붕괴 20년과 한반도 통일에 주는 교훈’이라는 주제의 심포지엄이 열렸다. 한국의 여러 학자들과 외국인 학자 12명이 참가했는데, 독일 정부도 후원한 이 회의에 참석한 외국인 학자들 대부분이 독일에서 왔다. 2차 대전과 냉전의 결과로 분단되었던 독일이 통일된 직후 한국인들은 비슷한 통일에 대한 희망에 부풀어 있었지만, 그것은 아직까지 실현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독일에서 배울 것은 아직도 많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대한 기존 연구도 적지 않지만, 이번 회의는 그것을 다시 확인해 주는 것이었다.
독일을 보고 우리가 부러워하는 것은 통일이면서, 또 그것이 유혈 없는 평화 통일이었다는 것이다. 독일의 경우를 보며, 통일 비용을 걱정하는 경우들이 있다. 그런데 정작 걱정해야 할 것은 내적 균열과 유혈의 비용일지 모른다. 배워야 할 것은 어떻게 이러한 대가를 피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합리적 민주주의가 ‘통독’ 기반
독일의 통일은, 포스탐대학의 베른트 쉬퇴버 교수의 말로는, “역사적 우연”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독일 측 발표에서 느낀 것은 통일을 향한 지극히 조용한 준비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기본은, 큰 관점에서 현실을 주시하면서, 격정보다는 침착한 마음으로, 얼핏 보기에는 거꾸로 가는 듯한 과정의 모순도 견디어 내는, 이성적인 정치 문화이다.
이번 회의에서 자유 베를린 대학의 베르너 페니히 교수는 단계적 접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빌리 브란트 총리가 자신의 정책을 설명하면서, “접근을 통한 변화” “작은 발걸음의 정치”를 말한 것도 이러한 단계적 준비를 말한 것이다. 물론 브란트 총리는 이것을 통일 전략으로 내세우지는 아니했다. 그러나 그것이 궁극적으로 통일에 도움이 된 것이다. 페니히 교수가 말하는 첫 단계는 “정상화”이다.
이것은 적대 관계를 자연스러운 이웃의 관계로 바꾸는 변화이다. 정상화를 위해서는 어느 한 쪽이 역사적 정통성이나 사회적 이상을 대표한다는, ‘단독 대표권 주장’이 없어져야 한다. 역설적인 것은 정상화가 반통일의 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상화 후에, “통일이 그렇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인가”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것은 오히려 통일을 가능하게 하는 심리적 준비가 될 수 있다. 통일을 바라지 않는 사람들의 두려움을 줄이고, 다른 한편으로 통일에 대해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의, ‘자신만의 방식으로 통일하여야 한다’는 강박감을 풀 수 있기 때문이다. 세대 교체는 이러한 유연화를 자연스러운 것이 되게 한다. ‘개인적인 동기 때문에 재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압력’이 약화되면서, 동시에 ‘협상하려는 의지가 강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 더 객관적이고 초연한 마음이 준비되는 것이다.
이러한 단계적 진행의 모형은 독일의 사례에서 도출한 것이다. 유연한 정책의 이니셔티브를 취한 것은 서독이었지만, 이미 그에 유리한 조건이 동서독에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동서독 간에 인적 교류와 교통은 완전히 단절된 것이 아니었다. 두 독일 사이에는 정보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유통되고 있었다.
동독에서는 공산당원을 포함하여 동독의 TV프로보다는 서독의 오락프로와 뉴스를 시청하는 사람이 많았다. 동독 정부는 여론 조사 기구를 가지고 국민 여론을 조사하면서 정책을 조정하고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동독 국민들의 압력으로 인한 것이었다. 동독 최후의 총리 로타르 드메치에르는 자유 선거에 의하여 선출되었고, 서독에서와 마찬가지로 동독에도 존재했던, 기독교연합(CDU) 소속이었다. 통일이 법적으로 공식화된 것은 통일조약을 통해서다. 페니히 교수가 말하듯이, “독일에서는 ‘구’ 독일민주공화국(DDR)과 연방공화국이 아니라, 드메치에르 총리 아래서 민주화된 새로운 DDR가 독일 연방에 합쳐진 것이다.”
‘민주화된 새로운 DDR’란 DDR에 민주화가 필요했다는 말이지만, 민주화는 이미 예비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동독에도 현실 합리성의 문화는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가 다원적 토의와 합의의 절차에 동의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현실 속에서 스스로의 행동을 조정하는 합리성은 민주주의 문화의 핵심이 된다. 이것 없이는 민주주의는 사회 제도의 구성원리가 될 수 없다. 통일의 방법으로는, 무력 통일, 흡수 통일, 합의 통일 등이 말하여지지만, 선거를 통하여 정부를 새로 구성하는 것도 말 할 수 있다. 그런데 단순한 형식으로서의 민주주의 선거는 자기만이 정당하다는 세력들의 혈투에 의하여 사회 분열의 심화만을 가져오는 것이 될 수 있다. 예멘은 90년에 분단되었던 남북의 합의로 평화 통일을 이룰 수 있었지만, 94에는 내전이 터지고, 무력 진압에 의한 재통일이 있어야 했다.
평화 통일에 합리적 민주주의가 중요하다는 것은, 통일에 수반된 법률행위에서도 볼 수 있다. 공식적 독일 통일은 통일협정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에 선행해서 화폐, 경제, 사회에 관한 국가협약이 있었고, 그 후에는 몇 번의 헌법 개정 그리고 총선거와 정부 구성이 있었다.
‘난투극’에 머문 한국 민주주의
뮌헨 대학의 게르하르트 A. 리터 교수는, 통일의 절차가 바르게 진행되는 데에 정치적, 행정적, 법률적 능력의 기여가 컸다는 것을 지적한다. 절차적 조처의 중요성은 통일 이후에도 볼 수 있다. 통일 이후 사회안정을 위해서, 사회국가로서의 서독의 제도와 기구-기초생활 보장, 실업보험, 노동, 그리고 사회에 관한 수많은 법과 집행 기구가 동독으로 이식되어야 했다. 놀라운 것은 공산주의 국가인 동독에서 노령, 상해, 사망에 대한 대책이나 미취업에 대한 사회보장 등이 불완전하고, 특권층과 일반국민 사이에 불평등이 심했다는 사실이다. 통일 이후에 이러한 것들은 서독의 수준에 맞추어 정비되었다.
페니히 교수는 햇볕정책을 조심스러운 단계적 진행을 겨냥하는 ‘장기 전략’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그 소득이 미미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는 주 원인이 북한이 정상화의 정책을 수용하는 것 같으면서도, 형식상으로만 그렇고 내용적으로는 이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는 데에서 찾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페니히 교수는 여기에 답하는 대신, 컬럼비아 대학의 새무얼 S. 김 교수의 말- 한국에서 통일은 “ ‘신성한’ 민족적 의무”가 되어 있지만, “덜 하는 것이 더 하는 것일 수 있다”는 김 교수의 말을 아시아적 지혜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여기에, “참으로 하나라면, 결국은 하나가 되어 가게 마련”이라는 브란트 총리의 말을 덧붙인다.
그래도 변화하는 통일의 기회를 지켜보면서 우선 할 수 있는 최소한, 그러면서 기초적인 일은 민주주의의 기반으로서 현실적 이성을 다져가는 일일 것이다. 얼마 전 많은 나라의 신문, TV는 주먹다짐하는 국회 모습을 한국적 민주주의의 상징으로서 크게 보여주었다. 지금 우리 민주주의는 이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통일이 다가온다고 할 때, 이러한 정치 문화는 그 대가를 한없이 크게 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김우창|이화여대 석좌교수>
입력 : 2009-09-23 18:11:13ㅣ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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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을 보고 우리가 부러워하는 것은 통일이면서, 또 그것이 유혈 없는 평화 통일이었다는 것이다. 독일의 경우를 보며, 통일 비용을 걱정하는 경우들이 있다. 그런데 정작 걱정해야 할 것은 내적 균열과 유혈의 비용일지 모른다. 배워야 할 것은 어떻게 이러한 대가를 피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합리적 민주주의가 ‘통독’ 기반
독일의 통일은, 포스탐대학의 베른트 쉬퇴버 교수의 말로는, “역사적 우연”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독일 측 발표에서 느낀 것은 통일을 향한 지극히 조용한 준비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기본은, 큰 관점에서 현실을 주시하면서, 격정보다는 침착한 마음으로, 얼핏 보기에는 거꾸로 가는 듯한 과정의 모순도 견디어 내는, 이성적인 정치 문화이다.
이번 회의에서 자유 베를린 대학의 베르너 페니히 교수는 단계적 접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빌리 브란트 총리가 자신의 정책을 설명하면서, “접근을 통한 변화” “작은 발걸음의 정치”를 말한 것도 이러한 단계적 준비를 말한 것이다. 물론 브란트 총리는 이것을 통일 전략으로 내세우지는 아니했다. 그러나 그것이 궁극적으로 통일에 도움이 된 것이다. 페니히 교수가 말하는 첫 단계는 “정상화”이다.
이것은 적대 관계를 자연스러운 이웃의 관계로 바꾸는 변화이다. 정상화를 위해서는 어느 한 쪽이 역사적 정통성이나 사회적 이상을 대표한다는, ‘단독 대표권 주장’이 없어져야 한다. 역설적인 것은 정상화가 반통일의 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상화 후에, “통일이 그렇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인가”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것은 오히려 통일을 가능하게 하는 심리적 준비가 될 수 있다. 통일을 바라지 않는 사람들의 두려움을 줄이고, 다른 한편으로 통일에 대해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의, ‘자신만의 방식으로 통일하여야 한다’는 강박감을 풀 수 있기 때문이다. 세대 교체는 이러한 유연화를 자연스러운 것이 되게 한다. ‘개인적인 동기 때문에 재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압력’이 약화되면서, 동시에 ‘협상하려는 의지가 강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 더 객관적이고 초연한 마음이 준비되는 것이다.
이러한 단계적 진행의 모형은 독일의 사례에서 도출한 것이다. 유연한 정책의 이니셔티브를 취한 것은 서독이었지만, 이미 그에 유리한 조건이 동서독에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동서독 간에 인적 교류와 교통은 완전히 단절된 것이 아니었다. 두 독일 사이에는 정보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유통되고 있었다.
동독에서는 공산당원을 포함하여 동독의 TV프로보다는 서독의 오락프로와 뉴스를 시청하는 사람이 많았다. 동독 정부는 여론 조사 기구를 가지고 국민 여론을 조사하면서 정책을 조정하고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동독 국민들의 압력으로 인한 것이었다. 동독 최후의 총리 로타르 드메치에르는 자유 선거에 의하여 선출되었고, 서독에서와 마찬가지로 동독에도 존재했던, 기독교연합(CDU) 소속이었다. 통일이 법적으로 공식화된 것은 통일조약을 통해서다. 페니히 교수가 말하듯이, “독일에서는 ‘구’ 독일민주공화국(DDR)과 연방공화국이 아니라, 드메치에르 총리 아래서 민주화된 새로운 DDR가 독일 연방에 합쳐진 것이다.”
‘민주화된 새로운 DDR’란 DDR에 민주화가 필요했다는 말이지만, 민주화는 이미 예비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동독에도 현실 합리성의 문화는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가 다원적 토의와 합의의 절차에 동의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현실 속에서 스스로의 행동을 조정하는 합리성은 민주주의 문화의 핵심이 된다. 이것 없이는 민주주의는 사회 제도의 구성원리가 될 수 없다. 통일의 방법으로는, 무력 통일, 흡수 통일, 합의 통일 등이 말하여지지만, 선거를 통하여 정부를 새로 구성하는 것도 말 할 수 있다. 그런데 단순한 형식으로서의 민주주의 선거는 자기만이 정당하다는 세력들의 혈투에 의하여 사회 분열의 심화만을 가져오는 것이 될 수 있다. 예멘은 90년에 분단되었던 남북의 합의로 평화 통일을 이룰 수 있었지만, 94에는 내전이 터지고, 무력 진압에 의한 재통일이 있어야 했다.
평화 통일에 합리적 민주주의가 중요하다는 것은, 통일에 수반된 법률행위에서도 볼 수 있다. 공식적 독일 통일은 통일협정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에 선행해서 화폐, 경제, 사회에 관한 국가협약이 있었고, 그 후에는 몇 번의 헌법 개정 그리고 총선거와 정부 구성이 있었다.
‘난투극’에 머문 한국 민주주의
뮌헨 대학의 게르하르트 A. 리터 교수는, 통일의 절차가 바르게 진행되는 데에 정치적, 행정적, 법률적 능력의 기여가 컸다는 것을 지적한다. 절차적 조처의 중요성은 통일 이후에도 볼 수 있다. 통일 이후 사회안정을 위해서, 사회국가로서의 서독의 제도와 기구-기초생활 보장, 실업보험, 노동, 그리고 사회에 관한 수많은 법과 집행 기구가 동독으로 이식되어야 했다. 놀라운 것은 공산주의 국가인 동독에서 노령, 상해, 사망에 대한 대책이나 미취업에 대한 사회보장 등이 불완전하고, 특권층과 일반국민 사이에 불평등이 심했다는 사실이다. 통일 이후에 이러한 것들은 서독의 수준에 맞추어 정비되었다.
페니히 교수는 햇볕정책을 조심스러운 단계적 진행을 겨냥하는 ‘장기 전략’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그 소득이 미미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는 주 원인이 북한이 정상화의 정책을 수용하는 것 같으면서도, 형식상으로만 그렇고 내용적으로는 이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는 데에서 찾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페니히 교수는 여기에 답하는 대신, 컬럼비아 대학의 새무얼 S. 김 교수의 말- 한국에서 통일은 “ ‘신성한’ 민족적 의무”가 되어 있지만, “덜 하는 것이 더 하는 것일 수 있다”는 김 교수의 말을 아시아적 지혜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여기에, “참으로 하나라면, 결국은 하나가 되어 가게 마련”이라는 브란트 총리의 말을 덧붙인다.
그래도 변화하는 통일의 기회를 지켜보면서 우선 할 수 있는 최소한, 그러면서 기초적인 일은 민주주의의 기반으로서 현실적 이성을 다져가는 일일 것이다. 얼마 전 많은 나라의 신문, TV는 주먹다짐하는 국회 모습을 한국적 민주주의의 상징으로서 크게 보여주었다. 지금 우리 민주주의는 이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통일이 다가온다고 할 때, 이러한 정치 문화는 그 대가를 한없이 크게 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김우창|이화여대 석좌교수>
입력 : 2009-09-23 18:11:13ㅣ수정 :
[김우창칼럼]국토 개조사업과 위기의 민주주의
정운찬 총리가 행정복합도시 계획의 수정 가능성을 언급한 다음 그에 대한 논의가 일고 찬반 의견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명박 대통령이 제안했던 운하 건설 계획을 수정한 4대강 정비 계획도 예산 등이 밝혀지고 그 집행을 위한 절차가 취해짐에 따라 다시 찬반 논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이러한 거대 국토 계획을 두고, 어느 쪽인가 입장을 택하고 찬반을 정하는 일은 심히 어려운 일이다. 팽팽하게 맞서 있는 견해는 다 그 나름대로 장단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4대강 사업은 전통적으로 국토 관리의 근본으로 생각되었던 치산치수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는 이를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사업으로 평가한다. 더 구체적으로 그것은, 경제 위기에 처하여, 고용확대를 위한 손쉬운 공공사업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이 가져올 수 있는 환경 파괴가 큰 우려의 대상이 되는 것도 당연하다. 얼른 보기에 삶의 편의를 증진하는 일이 더 큰 의미에서 삶의 조건의 악화와 질의 저하를 가져오는 일이 되는 것은 비일비재하다. 특히 자연 환경에 관계될 때 그러하다. 세계적으로 강을 정비하고 댐을 쌓고 하는 일들이 큰 저항에 부딪히고 있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일이다. 또 4대강 정비에 드는 경비를 생각할 때, 그 경비를 더욱 사회적 의미를 가진 사업에 써야 한다는 견해도 무시할 수 없다. 고용확대라는 케인스적인 처방도 생태계 보호와 사회정책의 손익 계산의 총계 속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4대강 등 찬반 조정 기제 결여
세종시의 문제는 여러 가지 면에서 4대강 정비와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계획-나라의 존재방식을 바꾸어 놓는 계획이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문제는 4대강의 경우보다 간단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는 것은 이해득실보다 합칠 필요가 없는 복합적 요소들을 하나로 합쳐 놓은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의 균형발전이라는 목표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역 발전과 수도 이전 또는 정부 부처의 이전 사이에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있는 것일까? 지방의 발전에 정부 부처 이전이 필수라면, 다른 지방의 경우에도 정부 부처의 이전이 있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지역발전이 아니라 이 계획의 정치적인 결과이다. 대통령은 서울에, 총리는 세종시에, 한 곳에는 6개 부처, 다른 한 곳에는 9개 부처를 두는 형식으로, 정부가 제대로 기능할 수 있을까? (177개의 공공기관도 널리 지방에 분산한다고 한다.) 또 행정부가 이렇게 흩어진 데다가, 국회는 서울에 남아 있게 될 터인데, 과연 괜찮은 것일까?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인하여, 그래도 정부가 제대로 움직일 것이라는 생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의 정부는 우리의 경험에도 없고, 세계적으로도 흔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정부체제가 기능하는 데에는 많은 시행착오를 각오한 긴 학습의 기간이 있어야 할 것이다. 정부 기구를 분산하는 것이 나쁜 아이디어가 아닐는지는 모르지만, 이 미지의 실험을 두고, 정부와 정치의 해체를 두려워하고, 지역발전의 목표와 새로운 정부 체제의 실험을 분리해보고자 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할 것이다.
물론 이것이 간단한 일일 수는 없다. 이미 정해지고 추진된 일에는 투자된 자금과 노력만이 아니라 투자된 수많은 삶이 있다. 그것을 다시 고치는 것은 새로운 계획만큼 사람의 삶을 뒤흔드는 것이 된다. 4대강 사업이 고용창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행정복합도시 건설도 그러한 의미를 갖는다. 투자된 기대와 이해를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일본에서는 하토야마 유키오 정권이 등장한 후, 자민당 정부의 토건주의에 종지부를 찍기 위하여, 군마현(群馬縣)의 얌바 댐을 비롯하여 여러 토목 공사들을 취소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지만, 주민들의 반발에 부딪혀 그러한 당초의 정책을 재고할 것이라고 전한다. 한 번 시작한 것은 되돌리기가 쉽지 않다.
그간 우리나라는 수많은 국토개발 계획을 만들고 집행해 왔다. 그것은 대체로 당국자들의 일방적인 결정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나, 국민들이 그것을 그대로 수용해 온 것은 정치권력의 비민주성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근대사회의 하부 구조를 만들어내는 데에 필요한 작업인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 그러한 개발 계획에 대한 반성이 생기고 저항이 이는 것은 그 필요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른 때문이지 않나 한다. 국토 계획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것은 조금 더 신중하고 장기적인 안목을 가진 것이어야 마땅하다. 한겨레 신문의 정석구 논설위원은, 400여 페이지의 정부 4대강 계획 백서를 살펴본 후, 4대강의 정비 사업을 긍정적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2, 3년의 단기간에 끝내려 할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한겨레 10월16일자 칼럼)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정치 풍토가 합리적인 협의의 과정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필자가 이 글에서 지적하려 했던 것은 위 계획들의 찬반을 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고 있는 찬반을 조정할 수 있는 기제가 우리 사회에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도 획일적인 지지를 쉽게 기대할 수는 없다. 그와 관련하여 우선 중요한 것은 전문가의 검토일 것이다.
합리적 논의 공간 만들어져야
그러나 현실의 복잡한 요인들과 힘들이 작용하는 맥락에서, 모든 작용과 부작용, 결과의 파급 효과를 예측하기는 극히 어려운 일이다. 미래를 위한 선택은 언제나 모험을 의미한다. 그리고 단순히 주어진 과제의 기술적인 문제를 넘어 중요한 것은 과제 자체의 경중에 대한 평가를 결정하는, 삶과 사회 그리고 정치에 대한 이해-간단히 말하여, 세계관이다. 그러나 상호 이해와 설득이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하나의 정치 과정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찬반이 일정하지 않을 때, 결론을 끌어내는 방법의 하나가 민주적 절차이다.
물론 이 경우 민주적 절차는 전문적인 견해를 충분히 참고하고 서로 상의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오늘의 대의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제도적으로 이러한 숙고와 절충과 선택의 과정을 매개하는 것은, 예외적인 경우가 없지 않다고 하겠지만, 국회이고 정부이고 또 언론이다.
그러나 찬반의 대결이 있는 사안을 그러한 과정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오늘의 분위기인 것이다. 찬반은 숙고와 절충이 아니라 바로 정치적 대결이 되고 정치투쟁이 된다. 반드시 정치의 이해관계 또는 파당적 관점으로만 판단할 수 없는 것이 4대강 정비나 세종시 문제일 텐데, 이에 대한 찬반은 예외없이 여야 좌우의 경계로 갈라진다. 그리고 그것은 정치 투쟁으로 치닫는다. 이러한 사례는 한둘이 아니다. 그것은 진정한 민주주의 정치 문화의 발전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절망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민주주의의 위기가 더러 말하여지지만, 합리적 논의의 공간을 허용하지 않는 정치풍토야말로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있다는 증거라고 할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어떤 문제에 찬반의 논의가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간에, 더 합리적이고 공공성을 가진 논의의 관습이 다시 태어나는 하나의 단계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
입력 : 2009-10-21 18:05:45ㅣ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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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으로서는 이러한 거대 국토 계획을 두고, 어느 쪽인가 입장을 택하고 찬반을 정하는 일은 심히 어려운 일이다. 팽팽하게 맞서 있는 견해는 다 그 나름대로 장단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4대강 사업은 전통적으로 국토 관리의 근본으로 생각되었던 치산치수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는 이를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사업으로 평가한다. 더 구체적으로 그것은, 경제 위기에 처하여, 고용확대를 위한 손쉬운 공공사업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이 가져올 수 있는 환경 파괴가 큰 우려의 대상이 되는 것도 당연하다. 얼른 보기에 삶의 편의를 증진하는 일이 더 큰 의미에서 삶의 조건의 악화와 질의 저하를 가져오는 일이 되는 것은 비일비재하다. 특히 자연 환경에 관계될 때 그러하다. 세계적으로 강을 정비하고 댐을 쌓고 하는 일들이 큰 저항에 부딪히고 있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일이다. 또 4대강 정비에 드는 경비를 생각할 때, 그 경비를 더욱 사회적 의미를 가진 사업에 써야 한다는 견해도 무시할 수 없다. 고용확대라는 케인스적인 처방도 생태계 보호와 사회정책의 손익 계산의 총계 속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4대강 등 찬반 조정 기제 결여
세종시의 문제는 여러 가지 면에서 4대강 정비와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계획-나라의 존재방식을 바꾸어 놓는 계획이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문제는 4대강의 경우보다 간단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는 것은 이해득실보다 합칠 필요가 없는 복합적 요소들을 하나로 합쳐 놓은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의 균형발전이라는 목표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역 발전과 수도 이전 또는 정부 부처의 이전 사이에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있는 것일까? 지방의 발전에 정부 부처 이전이 필수라면, 다른 지방의 경우에도 정부 부처의 이전이 있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지역발전이 아니라 이 계획의 정치적인 결과이다. 대통령은 서울에, 총리는 세종시에, 한 곳에는 6개 부처, 다른 한 곳에는 9개 부처를 두는 형식으로, 정부가 제대로 기능할 수 있을까? (177개의 공공기관도 널리 지방에 분산한다고 한다.) 또 행정부가 이렇게 흩어진 데다가, 국회는 서울에 남아 있게 될 터인데, 과연 괜찮은 것일까?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인하여, 그래도 정부가 제대로 움직일 것이라는 생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의 정부는 우리의 경험에도 없고, 세계적으로도 흔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정부체제가 기능하는 데에는 많은 시행착오를 각오한 긴 학습의 기간이 있어야 할 것이다. 정부 기구를 분산하는 것이 나쁜 아이디어가 아닐는지는 모르지만, 이 미지의 실험을 두고, 정부와 정치의 해체를 두려워하고, 지역발전의 목표와 새로운 정부 체제의 실험을 분리해보고자 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할 것이다.
물론 이것이 간단한 일일 수는 없다. 이미 정해지고 추진된 일에는 투자된 자금과 노력만이 아니라 투자된 수많은 삶이 있다. 그것을 다시 고치는 것은 새로운 계획만큼 사람의 삶을 뒤흔드는 것이 된다. 4대강 사업이 고용창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행정복합도시 건설도 그러한 의미를 갖는다. 투자된 기대와 이해를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일본에서는 하토야마 유키오 정권이 등장한 후, 자민당 정부의 토건주의에 종지부를 찍기 위하여, 군마현(群馬縣)의 얌바 댐을 비롯하여 여러 토목 공사들을 취소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지만, 주민들의 반발에 부딪혀 그러한 당초의 정책을 재고할 것이라고 전한다. 한 번 시작한 것은 되돌리기가 쉽지 않다.
그간 우리나라는 수많은 국토개발 계획을 만들고 집행해 왔다. 그것은 대체로 당국자들의 일방적인 결정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나, 국민들이 그것을 그대로 수용해 온 것은 정치권력의 비민주성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근대사회의 하부 구조를 만들어내는 데에 필요한 작업인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 그러한 개발 계획에 대한 반성이 생기고 저항이 이는 것은 그 필요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른 때문이지 않나 한다. 국토 계획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것은 조금 더 신중하고 장기적인 안목을 가진 것이어야 마땅하다. 한겨레 신문의 정석구 논설위원은, 400여 페이지의 정부 4대강 계획 백서를 살펴본 후, 4대강의 정비 사업을 긍정적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2, 3년의 단기간에 끝내려 할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한겨레 10월16일자 칼럼)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정치 풍토가 합리적인 협의의 과정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필자가 이 글에서 지적하려 했던 것은 위 계획들의 찬반을 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고 있는 찬반을 조정할 수 있는 기제가 우리 사회에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도 획일적인 지지를 쉽게 기대할 수는 없다. 그와 관련하여 우선 중요한 것은 전문가의 검토일 것이다.
합리적 논의 공간 만들어져야
그러나 현실의 복잡한 요인들과 힘들이 작용하는 맥락에서, 모든 작용과 부작용, 결과의 파급 효과를 예측하기는 극히 어려운 일이다. 미래를 위한 선택은 언제나 모험을 의미한다. 그리고 단순히 주어진 과제의 기술적인 문제를 넘어 중요한 것은 과제 자체의 경중에 대한 평가를 결정하는, 삶과 사회 그리고 정치에 대한 이해-간단히 말하여, 세계관이다. 그러나 상호 이해와 설득이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하나의 정치 과정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찬반이 일정하지 않을 때, 결론을 끌어내는 방법의 하나가 민주적 절차이다.
물론 이 경우 민주적 절차는 전문적인 견해를 충분히 참고하고 서로 상의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오늘의 대의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제도적으로 이러한 숙고와 절충과 선택의 과정을 매개하는 것은, 예외적인 경우가 없지 않다고 하겠지만, 국회이고 정부이고 또 언론이다.
그러나 찬반의 대결이 있는 사안을 그러한 과정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오늘의 분위기인 것이다. 찬반은 숙고와 절충이 아니라 바로 정치적 대결이 되고 정치투쟁이 된다. 반드시 정치의 이해관계 또는 파당적 관점으로만 판단할 수 없는 것이 4대강 정비나 세종시 문제일 텐데, 이에 대한 찬반은 예외없이 여야 좌우의 경계로 갈라진다. 그리고 그것은 정치 투쟁으로 치닫는다. 이러한 사례는 한둘이 아니다. 그것은 진정한 민주주의 정치 문화의 발전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절망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민주주의의 위기가 더러 말하여지지만, 합리적 논의의 공간을 허용하지 않는 정치풍토야말로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있다는 증거라고 할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어떤 문제에 찬반의 논의가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간에, 더 합리적이고 공공성을 가진 논의의 관습이 다시 태어나는 하나의 단계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
입력 : 2009-10-21 18:05:45ㅣ수정 :
[김우창 칼럼]정치적 정열 그리고 삶의 현실
입력 : 2009-11-04 18:06:19ㅣ수정 :
2주 전 이 칼럼에서 독일에서의 정치철학 논쟁을 소개한 바 있다. 이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어 찬반이 교차되고 있다. 논쟁의 핵심은 독일에서 사회국가라고 부르는 복지국가의 존재 방식의 문제이다. 슬로터다이크 교수가 사회국가의 근본적 변화 가능성을 말하여 화두를 열었다. 그가 사회국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에 대한 회의(懷疑)도 복지국가가 만들어놓은 공간에서 벌이는 놀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찬반의 어느 쪽이나 논의 전체가 이 공간의 여유로 하여금 가능해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이 논쟁은 그 자체로 부러울 수밖에 없는 사치로 보인다. 그렇다고 이것을 다시 살펴보는 것은 반드시 이 문제를 되새기려는 것보다, 이 논쟁의 여러 관점들에 비치는 정치 행동의 의미를 우리 자신을 위하여 음미해보자는 것이다.
되풀이 하건대, 슬로터다이크 교수가 시사한 것은 복지비용을 세금이 아니라 기부로 충당하는 제도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이것은 복지국가를 전복하려는 어리석고 위험한 제안이라는 것이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호네트 교수의 반박이었다. 미학자 칼 하인츠 보러러 교수는 다시 이를 반박하고 나섰다. 그의 글에 담긴 적지 않은 분노는 프랑크푸르트 사회철학자들이 보여주는 ‘우둔한 성실성’, 그리고 ‘좌파 순응주의’ 때문이다.
독일의 복지국가 존재방식 논쟁
그는 니체적인 활력-진부하고 일상적인 것을 넘어 높은 가치를 향하여 도약하는 투쟁의 삶을 좋아한다. 프랑크푸르트 철학자들이 혐오하는 불평등은 그러한 삶에서 자연스러운 부작용의 하나이다. 정치에서의 권력투쟁도 당연하다. 정치 없는 삶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자유는 평등보다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좌파순응주의는 도덕적 정당성, 보편성, 철학을 내세우면서, 삶의 방식으로 “파시스트적인 것보다는 따분한 것”을 선택한다.
보러러 교수는 이런 협소한 도덕주의에 대조하여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정치적 태도를 든다. 하이네가 좋아한 정치구호는 프랑스혁명의 지도자 루이 앙투안 드 생쥐스트의 말, “빵은 인민의 권리”라는 말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평등과 자유 사이에 존재하는 본래적인 긴장과 갈등을 잘 알고 있었다. 프랑크푸르트의 철학자들이 잊어버린 것은 이것이다.
그런데 하이네를 예로 드는 것을 보면, 프랑크푸르트식 사회민주주의에 반대하지만 보러러 교수가 반드시 우파 보수주의를 지지하는 것인지 어쩐지는 분명치 않다.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지 문화부의 파트릭 바너스가 이 글을 평하면서 밝히고 있는 것은 하이네가 열렬한 민중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하이네에 있어서, 생쥐스트의 “인민의 빵에 대한 권리”는 “인간의 신성한 권리”가 되고, 쟁취해야 하는 것은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아니라 “인간의 신적(神的)인 권리”가 된다. 이 권리에 기초한 나라는 “모두가 똑같이 영웅이고 똑같이 성스러우며, 똑같이 지복 속에 있는 신들의 민주체제이다”. 부자가 빵을 나누어주는 것이 슬로터다이크의 베풂의 사회국가라고 하면, 거기에서 “부자가 주는 빵은 입에 쓰고, 자유를 손상할 것이다. 빵은 좋은…당연한 권리에 의하여 인민의 것이다”. 빵은 일한 만큼 나누어 갖는 것이 아니다. “행복과 일이 일한 만큼에 비례해야 한다는 것은 하이네의 생각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신들은 일을 하지 않는다.”
하이네는 그의 만년의 신문 기고에서, 그것이 반드시 이성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빵의 권리에서 나오는 혁명의 논리에 사로잡히고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정열에 휩쓸리게 된다는 것을 말했다. 보러러 교수의 하이네 언급이, 위에서 말한 바과 같이, 그 혁명적 정열을 옹호하기 위한 것인지 어쩐지는 분명치 않다. 그가 옹호하는 것이 무엇이든지간에, 우리는 삶의 정열이 여러 가지로-기업가의 의욕 또는 혁명적 상상력의 비상(飛翔)으로-여러 다른 정치 지향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는 그것이 따분한 일상성으로부터의 해방을 약속하는 것일는지 모르지만, 삶의 질서를 송두리째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위에 언급한 기고에서 하이네는 공산주의 혁명의 도래를 예언하면서 그 철권 아래 모든 예술-대리석상과 꽃밭과 시가 파괴될 수 있다는 데 대하여 우려를 표명했다. 하이네에게 전형적인 혁명의 인간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생쥐스트였다. 생쥐스트는 많은 사람에게 정치와 삶의 착잡한 관계를 밝혀주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서 정치는 전적인 선의(善意)와 유토피아적 열망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가 논리와 정렬의 과정에서-그것은 극히 엄격한 금욕적인 것이었지만-완전히 그 반대의 것이 된다. 이것이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이 보여주는 생쥐스트이다. 생쥐스트는 인민이 빵의 권리를 향수하고 자연의 순진무구한 덕성에 의하여 살 수 있게 하는 정치 체제를 원했다. 그것을 위해서는 사회의 혁명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
인생의 참 의미는 구체적 삶속에
그리고 이에 장해가 되는 자들은 가차없이 제거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여 공포정치와 단두대가 등장한다. 이것은 다수의 번영을 위하여 소수를 희생하기 위한 것이다. 생쥐스트의 계산은 아니지만, 단두대에서 사라져야 할 사람의 수는 ‘27만3000명’이다. 정치의 아이러니는 생쥐스트 자신도 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다.
카뮈의 생각으로는 불의에 저항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으로 논리를 만들고 철학을 만드는 것은 잘못이다. 인생의 참 의미는 추상적 계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김화영 교수가 요약하는 바로는, “행복의 욕구, 살고 사랑하고자 하는 열정, 그리고 태양, 바다, 우정, 연민”-이러한 것들에 있다. 물론 사회와 역사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 속의 존재로서의 인간과 일정한 관계가 있어야 한다.
카뮈는 이것을 어린 시절의 체험에 옮겨서, “가난이 나에게 불행이었던 것은 한 번도 없다. 빛이 그 부(富)를 그 위에 뿌려주는 것이었다”고 썼다. 가난이라는 사회적 조건과 태양이라는 자연 조건 사이에 놓인 것이 그의 삶이었다.
한국 사회에 넘치는 것이 정치적 정열이다. 문제가 많은 사회에 있어서 이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모든 작은 문제에까지도 이념과 당파적 정열이 동원되는 것이 옳은 일인가? 그러다보면 사람의 구체적인 삶의 현실이 시계에서 보이지 않게 된다.
나의 아이디어와 정열이 풀어야 할 우리의 현실의 문제보다 중요한 것이다. 보러러 교수는 프랑크푸르트 철학자들이 추상적인 개념을 추구하다가 사실의 사실성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반드시 맞는 판단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추상적 이념의 추구, 그리고 그에 이어져 있는 정열이 현실과 동떨어지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정치적 이념과 정열이 범람한 가운데 정치에 대한 냉소적 태도가 커져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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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풀이 하건대, 슬로터다이크 교수가 시사한 것은 복지비용을 세금이 아니라 기부로 충당하는 제도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이것은 복지국가를 전복하려는 어리석고 위험한 제안이라는 것이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호네트 교수의 반박이었다. 미학자 칼 하인츠 보러러 교수는 다시 이를 반박하고 나섰다. 그의 글에 담긴 적지 않은 분노는 프랑크푸르트 사회철학자들이 보여주는 ‘우둔한 성실성’, 그리고 ‘좌파 순응주의’ 때문이다.
독일의 복지국가 존재방식 논쟁
그는 니체적인 활력-진부하고 일상적인 것을 넘어 높은 가치를 향하여 도약하는 투쟁의 삶을 좋아한다. 프랑크푸르트 철학자들이 혐오하는 불평등은 그러한 삶에서 자연스러운 부작용의 하나이다. 정치에서의 권력투쟁도 당연하다. 정치 없는 삶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자유는 평등보다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좌파순응주의는 도덕적 정당성, 보편성, 철학을 내세우면서, 삶의 방식으로 “파시스트적인 것보다는 따분한 것”을 선택한다.
보러러 교수는 이런 협소한 도덕주의에 대조하여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정치적 태도를 든다. 하이네가 좋아한 정치구호는 프랑스혁명의 지도자 루이 앙투안 드 생쥐스트의 말, “빵은 인민의 권리”라는 말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평등과 자유 사이에 존재하는 본래적인 긴장과 갈등을 잘 알고 있었다. 프랑크푸르트의 철학자들이 잊어버린 것은 이것이다.
그런데 하이네를 예로 드는 것을 보면, 프랑크푸르트식 사회민주주의에 반대하지만 보러러 교수가 반드시 우파 보수주의를 지지하는 것인지 어쩐지는 분명치 않다.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지 문화부의 파트릭 바너스가 이 글을 평하면서 밝히고 있는 것은 하이네가 열렬한 민중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하이네에 있어서, 생쥐스트의 “인민의 빵에 대한 권리”는 “인간의 신성한 권리”가 되고, 쟁취해야 하는 것은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아니라 “인간의 신적(神的)인 권리”가 된다. 이 권리에 기초한 나라는 “모두가 똑같이 영웅이고 똑같이 성스러우며, 똑같이 지복 속에 있는 신들의 민주체제이다”. 부자가 빵을 나누어주는 것이 슬로터다이크의 베풂의 사회국가라고 하면, 거기에서 “부자가 주는 빵은 입에 쓰고, 자유를 손상할 것이다. 빵은 좋은…당연한 권리에 의하여 인민의 것이다”. 빵은 일한 만큼 나누어 갖는 것이 아니다. “행복과 일이 일한 만큼에 비례해야 한다는 것은 하이네의 생각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신들은 일을 하지 않는다.”
하이네는 그의 만년의 신문 기고에서, 그것이 반드시 이성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빵의 권리에서 나오는 혁명의 논리에 사로잡히고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정열에 휩쓸리게 된다는 것을 말했다. 보러러 교수의 하이네 언급이, 위에서 말한 바과 같이, 그 혁명적 정열을 옹호하기 위한 것인지 어쩐지는 분명치 않다. 그가 옹호하는 것이 무엇이든지간에, 우리는 삶의 정열이 여러 가지로-기업가의 의욕 또는 혁명적 상상력의 비상(飛翔)으로-여러 다른 정치 지향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는 그것이 따분한 일상성으로부터의 해방을 약속하는 것일는지 모르지만, 삶의 질서를 송두리째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위에 언급한 기고에서 하이네는 공산주의 혁명의 도래를 예언하면서 그 철권 아래 모든 예술-대리석상과 꽃밭과 시가 파괴될 수 있다는 데 대하여 우려를 표명했다. 하이네에게 전형적인 혁명의 인간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생쥐스트였다. 생쥐스트는 많은 사람에게 정치와 삶의 착잡한 관계를 밝혀주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서 정치는 전적인 선의(善意)와 유토피아적 열망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가 논리와 정렬의 과정에서-그것은 극히 엄격한 금욕적인 것이었지만-완전히 그 반대의 것이 된다. 이것이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이 보여주는 생쥐스트이다. 생쥐스트는 인민이 빵의 권리를 향수하고 자연의 순진무구한 덕성에 의하여 살 수 있게 하는 정치 체제를 원했다. 그것을 위해서는 사회의 혁명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
인생의 참 의미는 구체적 삶속에
그리고 이에 장해가 되는 자들은 가차없이 제거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여 공포정치와 단두대가 등장한다. 이것은 다수의 번영을 위하여 소수를 희생하기 위한 것이다. 생쥐스트의 계산은 아니지만, 단두대에서 사라져야 할 사람의 수는 ‘27만3000명’이다. 정치의 아이러니는 생쥐스트 자신도 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다.
카뮈의 생각으로는 불의에 저항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으로 논리를 만들고 철학을 만드는 것은 잘못이다. 인생의 참 의미는 추상적 계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김화영 교수가 요약하는 바로는, “행복의 욕구, 살고 사랑하고자 하는 열정, 그리고 태양, 바다, 우정, 연민”-이러한 것들에 있다. 물론 사회와 역사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 속의 존재로서의 인간과 일정한 관계가 있어야 한다.
카뮈는 이것을 어린 시절의 체험에 옮겨서, “가난이 나에게 불행이었던 것은 한 번도 없다. 빛이 그 부(富)를 그 위에 뿌려주는 것이었다”고 썼다. 가난이라는 사회적 조건과 태양이라는 자연 조건 사이에 놓인 것이 그의 삶이었다.
한국 사회에 넘치는 것이 정치적 정열이다. 문제가 많은 사회에 있어서 이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모든 작은 문제에까지도 이념과 당파적 정열이 동원되는 것이 옳은 일인가? 그러다보면 사람의 구체적인 삶의 현실이 시계에서 보이지 않게 된다.
나의 아이디어와 정열이 풀어야 할 우리의 현실의 문제보다 중요한 것이다. 보러러 교수는 프랑크푸르트 철학자들이 추상적인 개념을 추구하다가 사실의 사실성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반드시 맞는 판단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추상적 이념의 추구, 그리고 그에 이어져 있는 정열이 현실과 동떨어지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정치적 이념과 정열이 범람한 가운데 정치에 대한 냉소적 태도가 커져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
입력 : 2009-11-04 18:06:19ㅣ수정 :
[김우창칼럼]레비스트로스와 제3 휴머니즘
입력 : 2009-11-18 17:48:47ㅣ수정 :
가족의 의사로 며칠이 지난 다음에야 알려지게 되었지만, 지난달 30일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타계했다. 그는 20세기 서양의 인류학계,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 사상계의 대학자였고, 우리 학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구조주의 창시자의 한 사람으로 알려졌던 그에 대한 관심이 시간과 더불어 줄어드는 것은 별 수 없는 일이다. 유행의 시대에서 그의 생각에 시비를 걸던 ‘구조주의 이후 사조(post-structuralism)’까지도 상당히 퇴조했다. 그러나 20세기를 생각하고 세계와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 레비스트로스는 중요한 문제들을 상기시켜주는 사상가임에 틀림없다.
인류학의 명저 ‘슬픈 열대’
19세기로부터 또는 더 소급하여 17세기로부터 세계사의 주역은 서양이었다. 이것은 좋은 일에서나 나쁜 일에서나 그러했음으로 반드시 긍정적인 일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좋고 나쁨에 관계없이 그 영향으로 비서양 사회들도 서양을 기준으로 하여 자신들의 현재를 평가하고 비슷한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압력을 피하기 어려웠다. 이제 그 압력이 조금 줄어든 것은 국제적인 세력 중심의 이동으로 인한 것이지만, 반제국주의 사상의 성장도 여기에 한몫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레비스트로스의 사상적 기여도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서양중심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은 군사력이나 경제력의 팽창과 침해의 부당성을 말하거나 서양 세력에 밀리고 눌리는 사회들도 서양과 같은 자주성과 경제적 번영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만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인간의 사회적 삶을 보는 가치 기준을 바꾸어 놓으려 했다는 데 있다.
오랜 기간의 역사를 하나의 흐름으로 파악하려 할 때 지배적인 관점이 되어 온 것은 발전 사관이었다. 사회는 여러 발전의 단계를 거쳐 후진 상태로부터 선진의 상태로 나아가고, 세계의 여러 사회들은 이 발전의 일직선상에 배열되어 평가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발전 사관은 서양 근대사상의 소산이지만 화이(華夷), 문명과 야만 등을 대립시켜보아 온 동양의 역사관에도 비슷한 것이 있었다.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모든 사회는, 미개인가 문명된 것인가에 관계없이, 일정한 구조적 전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리하여 독립된 사회는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을 그 나름으로 포괄하고 있는 유기적 구조이다. 서로 다른 사회들은 문제 해결의 여러 다른 모형들을 나타낸다. 이러한 자기 충족적 구조로서의 사회들을, 차이가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미개와 문명의 척도로 구별하여 줄을 세우는 것은 정당한 일일 수 없다. (여기에 함축된 반진보주의는 당초에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았던 레비스트로스를 마르크스주의로부터 갈라놓는 이론적 분기점이 되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레비스트로스의 공감은, 적어도 사회를 삶의 문제 해결을 위한 기계로 볼 때, 발전 사관이 말하는 문명사회보다는 원시사회를 향한다. 문명사회가 발전해 온 사회라면, 비문명사회의 특징은 발전하지 않는 데 있다. 비문명사회는 그 나름대로 충분한 문제 해결의 구조를 발전시켜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전을 거부하는 것이다-레비스트로스는 이렇게 생각한다.
인류학의 범위를 넘어 레비스트로스를 유명하게 한 첫 저서는 <슬픈 열대>(1955)이다. 그것은, 이 책이 인류학적인 관찰에 더하여 철학적인 성찰과 문학적인 서사를 담고 있는 저서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주장의 설득력 때문이었다고 할 것이다. 브라질 아마존 지역의 윈주민 사회에 대한 관찰과 분석이 책의 주된 내용이지만, 주조(主調)가 되어 있는 것은 책의 서정적인 제목에 시사되어 있다. 서구사회에 대한 비판적 저항감을 가지고 있던 그는, 아마존의 원시 부족을 연구하러 갔을 때, 원시사회에 대한 루소적 동경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반드시 그의 기대에 맞아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현실로서의 원시사회는 참모습의 원시사회가 아니고 서구문명에 의하여 내몰리고 황폐화되고 지리멸렬된 사회라는 결론을 내렸다. “저개발은 개발의 산물”이라는 종속이론의 주장을 미리 실감한 것이다. 그 깨달음이 그가 찾아간 열대를 “슬픈” 곳으로 보이게 한 것이다.
그가 체험한 열대는 그러했지만, 그의 인류학 연구는 결국 원시사회가 잃어버린 낙원이었다는 것을 확인해주었다. 풍요가 경제발전의 결과라는 것은 현대인의 착각이다. 원시사회야말로 풍요한 사회였다. 사람들은 하루에 2시간 내지 4시간을 일했다. 생산성의 제한은 자연과의 조화를 보장하여 주었다. 그들은 일하고 남는 시간은 종교, 몽상, 예술, 의례에 바쳤다. 화목한 공동체의 모든 결정은 만장일치로 이루어졌다. 질병은 거의 없었다. 그것은 생활 단위가 수십에서 수백 명 인구의 소규모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농경이 없던 이들 원시사회에서 농경의 시작과 더불어 말라리아가 퍼지기 시작했다.) 인간관계를 간접화하는 문자가 없었다. (<슬픈 열대>에는 문자와 더불어 지위와 권력의 경쟁이 시작되는 현상에 대한 관찰이 있다.)
비문명사회의 지혜 존중 역설
이러한 원시사회의 모습은 현대문명에 대한 레비스트로스의 생각에서 중요한 기준이 된다. 그렇다고 현대의 대규모 사회에서 소규모 원시사회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을 그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역사의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비판적이면서도 자신이 서구의 지적 전통 안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국을 방문한 지 5년 후인 1986년 일본에서 인류학과 세계의 미래에 대해 강연하면서, 그는 인류학이 제3의 휴머니즘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첫 번째 휴머니즘은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이다. 두 번째 휴머니즘은 19세기 이후 이문화(異文化)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던 유럽의 부르주아 휴머니즘이다. 이들 인문주의는 보편적 인간성 수용을 지향했지만 특권계급과 특권적 사회에서 나온 것으로서 전쟁, 빈곤, 기아, 자연자원 남용, 환경 파괴, 자연미의 파괴-이러한 현대사회의 재난들을 막아낼 수 없었다. 제3 휴머니즘은 인간 문명 전부에 대해 눈을 돌리고 차이들을 존중하면서 여러 문화에서 발견되는 인간 문제에 대한 해결책들을 겸허한 자세로 참조하고자 하는, 인간적 선의와 각성을 대표한다. 특히 배워야 할 것은 비문명사회의 지혜이다. 그 사회들은 “생산된 부(富)를 사회적 도의적 가치로 전환하는 원리들을 가지고 있었다. 노동을 통한 개인의 자기실현, 친족과 이웃 간의 상호 존경, 사람의 도의적·사회적 위엄, 인간과 자연 그리고 초자연과의 조화를 가능하게 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따로따로 존재하는 작은 사회에서 실현될 수 있는 가치들이었다. 그러나 그도 인정하다시피 사회가 다른 사회와의 교류를 통하여 배우고 발전하는 것도 사실이다. 또 오늘날 인류가 함께 하나의 세계문화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것도 역사의 흐름이다. 원시사회의 인간적 가치가 재현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시지프스의 노역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적 가치에 주의하고 그것을 포용할 구조의 투명성을 지키려는 노력-이것이 없이는 사람의 삶은 살 만한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
인류학의 명저 ‘슬픈 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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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간의 역사를 하나의 흐름으로 파악하려 할 때 지배적인 관점이 되어 온 것은 발전 사관이었다. 사회는 여러 발전의 단계를 거쳐 후진 상태로부터 선진의 상태로 나아가고, 세계의 여러 사회들은 이 발전의 일직선상에 배열되어 평가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발전 사관은 서양 근대사상의 소산이지만 화이(華夷), 문명과 야만 등을 대립시켜보아 온 동양의 역사관에도 비슷한 것이 있었다.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모든 사회는, 미개인가 문명된 것인가에 관계없이, 일정한 구조적 전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리하여 독립된 사회는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을 그 나름으로 포괄하고 있는 유기적 구조이다. 서로 다른 사회들은 문제 해결의 여러 다른 모형들을 나타낸다. 이러한 자기 충족적 구조로서의 사회들을, 차이가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미개와 문명의 척도로 구별하여 줄을 세우는 것은 정당한 일일 수 없다. (여기에 함축된 반진보주의는 당초에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았던 레비스트로스를 마르크스주의로부터 갈라놓는 이론적 분기점이 되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레비스트로스의 공감은, 적어도 사회를 삶의 문제 해결을 위한 기계로 볼 때, 발전 사관이 말하는 문명사회보다는 원시사회를 향한다. 문명사회가 발전해 온 사회라면, 비문명사회의 특징은 발전하지 않는 데 있다. 비문명사회는 그 나름대로 충분한 문제 해결의 구조를 발전시켜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전을 거부하는 것이다-레비스트로스는 이렇게 생각한다.
인류학의 범위를 넘어 레비스트로스를 유명하게 한 첫 저서는 <슬픈 열대>(1955)이다. 그것은, 이 책이 인류학적인 관찰에 더하여 철학적인 성찰과 문학적인 서사를 담고 있는 저서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주장의 설득력 때문이었다고 할 것이다. 브라질 아마존 지역의 윈주민 사회에 대한 관찰과 분석이 책의 주된 내용이지만, 주조(主調)가 되어 있는 것은 책의 서정적인 제목에 시사되어 있다. 서구사회에 대한 비판적 저항감을 가지고 있던 그는, 아마존의 원시 부족을 연구하러 갔을 때, 원시사회에 대한 루소적 동경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반드시 그의 기대에 맞아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현실로서의 원시사회는 참모습의 원시사회가 아니고 서구문명에 의하여 내몰리고 황폐화되고 지리멸렬된 사회라는 결론을 내렸다. “저개발은 개발의 산물”이라는 종속이론의 주장을 미리 실감한 것이다. 그 깨달음이 그가 찾아간 열대를 “슬픈” 곳으로 보이게 한 것이다.
그가 체험한 열대는 그러했지만, 그의 인류학 연구는 결국 원시사회가 잃어버린 낙원이었다는 것을 확인해주었다. 풍요가 경제발전의 결과라는 것은 현대인의 착각이다. 원시사회야말로 풍요한 사회였다. 사람들은 하루에 2시간 내지 4시간을 일했다. 생산성의 제한은 자연과의 조화를 보장하여 주었다. 그들은 일하고 남는 시간은 종교, 몽상, 예술, 의례에 바쳤다. 화목한 공동체의 모든 결정은 만장일치로 이루어졌다. 질병은 거의 없었다. 그것은 생활 단위가 수십에서 수백 명 인구의 소규모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농경이 없던 이들 원시사회에서 농경의 시작과 더불어 말라리아가 퍼지기 시작했다.) 인간관계를 간접화하는 문자가 없었다. (<슬픈 열대>에는 문자와 더불어 지위와 권력의 경쟁이 시작되는 현상에 대한 관찰이 있다.)
비문명사회의 지혜 존중 역설
이러한 원시사회의 모습은 현대문명에 대한 레비스트로스의 생각에서 중요한 기준이 된다. 그렇다고 현대의 대규모 사회에서 소규모 원시사회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을 그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역사의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비판적이면서도 자신이 서구의 지적 전통 안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국을 방문한 지 5년 후인 1986년 일본에서 인류학과 세계의 미래에 대해 강연하면서, 그는 인류학이 제3의 휴머니즘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첫 번째 휴머니즘은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이다. 두 번째 휴머니즘은 19세기 이후 이문화(異文化)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던 유럽의 부르주아 휴머니즘이다. 이들 인문주의는 보편적 인간성 수용을 지향했지만 특권계급과 특권적 사회에서 나온 것으로서 전쟁, 빈곤, 기아, 자연자원 남용, 환경 파괴, 자연미의 파괴-이러한 현대사회의 재난들을 막아낼 수 없었다. 제3 휴머니즘은 인간 문명 전부에 대해 눈을 돌리고 차이들을 존중하면서 여러 문화에서 발견되는 인간 문제에 대한 해결책들을 겸허한 자세로 참조하고자 하는, 인간적 선의와 각성을 대표한다. 특히 배워야 할 것은 비문명사회의 지혜이다. 그 사회들은 “생산된 부(富)를 사회적 도의적 가치로 전환하는 원리들을 가지고 있었다. 노동을 통한 개인의 자기실현, 친족과 이웃 간의 상호 존경, 사람의 도의적·사회적 위엄, 인간과 자연 그리고 초자연과의 조화를 가능하게 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따로따로 존재하는 작은 사회에서 실현될 수 있는 가치들이었다. 그러나 그도 인정하다시피 사회가 다른 사회와의 교류를 통하여 배우고 발전하는 것도 사실이다. 또 오늘날 인류가 함께 하나의 세계문화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것도 역사의 흐름이다. 원시사회의 인간적 가치가 재현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시지프스의 노역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적 가치에 주의하고 그것을 포용할 구조의 투명성을 지키려는 노력-이것이 없이는 사람의 삶은 살 만한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
입력 : 2009-11-18 17:48:47ㅣ수정 :
[김우창칼럼]사회 유용성의 기준과 공론
초고속 경제 번영을 바라는 모든 나라 사람들이 선망의 대상으로 삼았던 두바이가 파산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 보도가 있기 직전, 뉴욕타임스에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의 칼럼이 실려 있었다. 요지는 중과세로 단기 금융 투기 거래를 억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조처에 대하여 영국의 고든 브라운 총리를 비롯하여 유럽연합(EU)의 여러 지도자가 이에 찬동하는 의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중과세의 정당성은, 금융 투기가 전적으로 ‘사회적 유용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이것은 또 다른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제임스 토빈 교수가 1970년대부터 주장한 이론인데, 그 타당성은 근년의 경제위기로 증명되었다고 크루그먼은 말한다. 두바이 사태는 다시 한 번 그 타당성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크루그먼은 경제의 사회적 영향을 중시하고 경제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 개입을 옹호하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자유주의 경제학자이다. 투기 금융에 대한 크루그먼의 의견은 자유주의 경제에서의 자유로운 경제활동도 궁극적으로는 사회에 대한 유용성에 의하여 정당화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경제 활동은 사회 전체 관점에서 사회적 유용성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
4대강 유용성 관점서 검토해야
요즘 우리 정치에서 논란의 중심이 되고 공론의 공간을 휘몰아 가고 있는 것은 정부가 내놓은 4대강 정비계획과 세종시 개발 수정 계획안이다. 걱정스러운 것은 이러한 논란의 쟁점이 무엇인지가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일반시민이 받는 인상은 주로 당파적 이익이나 잘못 파악된 집단 이익이 이러한 논란에 나오는 주장들을 강경 일변도가 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 우리 공론계의 풍습은 크고 작은 비중이야 어떤 것이든 사안이 있으면, 그것을 국론 분열이 분명해질 때까지 최대한으로 밀고 나가자는 것이다. 금융 문제에서 그러해야 하는 것처럼 국가 정책이 논의 대상이 된다면,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은 사회적 유용성이어야 한다. 이 유용성의 관점에서 사람들은 장단점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또 그 기준으로 정책의 세부를 검토하게 됨에 따라 의견의 차이가 일어나고 정책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지고 의견의 조정이 필요해지는 것이 공론의 정상적인 과정이다.
물론 사회적 유용성이라고 해도 그것 자체가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다른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차이가 전적으로 협의의 범위를 넘어갈 정도로 다른 것일 수 없는 것이 지금의 사정이 아닐까 한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경제적 유용성이다. 오늘날 정책 수립자들은 경제성장의 필요나 압력을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경제적 평가는 다시 사회적 유용성의 기준에 맞아들어가야 한다. 정책은 성장에 못지 않게 사회의 전반적 발전-빈부 격차의 해소, 사회적 배분과 균형의 확보에 기여한다는 점에 수렴되는 것이라야 할 것이다. 사회 문제와 경제 문제를 이어서 생각하는 관점에서 보면 더 직접적으로 실업과 고용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떤 기여가 있을 수 있느냐도 쟁점이 될 것이다. 고용의 문제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완전한 해결이 있을 수 없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한 대책은 사회 안전망의 보강이다. 지금 논란의 대상이 되어있는 신도시 개발과 토목개발의 계획이 고용 문제에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는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오늘의 경제와 사회의 위기적 성격을 긴급한 것으로 본다는 전제하에서 그러하다. 긴급하다고 해도, 다른 대체 방안이 없을 것인가가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다시 제안된 사업들이 그 자체로서 유용한 사업인가 하는 평가에 관계되어 일어나는 문제이다. 그 자체로 유용한 경우, 그것은 일석이조의 효과를 갖는 것일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경우, 그것은 추진되어서는 아니될 사업들이 될 것이다. 또 평가는 궁극적으로 경제적·사회적 유용성을 단기적으로 생각해야 하느냐 장기적으로 생각해야 하느냐 하는 데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고려 사항은, 모든 토목 공사는 국토와 환경 조건을 크게 바꾸어 놓는 일이기 때문에 국토 환경의 문제가 될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현지 주민이나 전문가가 아니고는 실감과 전문적 지식을 가지고 현안의 거대 토목 공사들을 바르게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그러한 거대 사업들을 서둘러 강행할 단계는 지나지 않았는가 하는 느낌을 가지고 있고, 토목 사업 일반에 대한 피로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사업들이 있을 수 있는 발상인 것도 틀림이 없다.
합리적으로 가장 쉽게 납득할 수 있는 것은 환경 오염의 가능성을 걱정하는 의견들이다. 환경 문제가 가장 신중하게 고려되어야 할 문제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정비 작업과 더불어 환경 대책을 철저하게 보강할 수 없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세종시의 경우 문제는 비교적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정부 기구들의 분산이 국가 기능 전체를 마비하게 하거나 비능률에 빠지게 할 가능성이 있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지방 발전에 중앙 정부기구들의 이전이 필요하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다. 계획 변경에 따라 그 동안 부풀었던 기대와 진행된 계획과 관련하여 피해 보상 조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보상이 또 다른 과대한 토목 공사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건전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무조건 경화되어 가는 정치논쟁
경부선 철도가 건설될 때, 공주 유지들의 반대로 경부선은 공주가 아니라 대전을 향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배경에 있는 생각은 풍수설이었다고 하는데, 풍수설은 전래의 환경주의 철학이다. 어떤 경우에나 참다운 발전은 내재하는 잠재력을 열어 놓는 발전이라야 한다. 중앙 권력은 밖으로부터 계획을 들이밀 것이 아니라 안에서 나오는 유기적 발전을 도와야 한다. 세종시는 약속한 것이기 때문에 신의를 지키라는 주장이 있다. 중요한 것은 선거 때의 즉흥적 약속보다는 나라의 현실과 장래를 위한 깊고 먼 고려이다. 앞으로의 득표 계산에서 불이익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선거 중의 약속을 변경한다면, 적어도 그것은 심각한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
다시 한 번 걱정스러운 것은 무조건 경화되어가는 정치 논쟁들이다. 찬반의 많은 논의에서 우리는 미래에 대한 길고 넓은 비전을 느끼지 못한다. 현안이 되어 있는 사업들에 대하여 사회적 유용성의 기준에서 따지고 드는 합리적 검토도 별로 보지 못한다. 그러한 논의와 검토가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대립과 분파작용 속에 흡수되어버리는 것이 지금의 풍토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논의에 참여하는 것을 꺼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것은 공론 공간의 투명성을 흐리는 것을 거드는 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러한 문제를 거론하는 것도, 부질없음을 알면서 경향신문으로부터 칼럼 종료의 통보를 받고, 이것이 마지막 기회이기에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는 것일 뿐이다.
2003년 12월부터 연재해온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의 칼럼 ‘시대의 흐름에 서서’를 마칩니다. 6년간 칼럼을 통해 지성적 사유와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준 김 교수께 사의를 표합니다.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김우창 | 이화여대 석좌교수>
입력 : 2009-12-02 17:56:00ㅣ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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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강 유용성 관점서 검토해야
요즘 우리 정치에서 논란의 중심이 되고 공론의 공간을 휘몰아 가고 있는 것은 정부가 내놓은 4대강 정비계획과 세종시 개발 수정 계획안이다. 걱정스러운 것은 이러한 논란의 쟁점이 무엇인지가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일반시민이 받는 인상은 주로 당파적 이익이나 잘못 파악된 집단 이익이 이러한 논란에 나오는 주장들을 강경 일변도가 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 우리 공론계의 풍습은 크고 작은 비중이야 어떤 것이든 사안이 있으면, 그것을 국론 분열이 분명해질 때까지 최대한으로 밀고 나가자는 것이다. 금융 문제에서 그러해야 하는 것처럼 국가 정책이 논의 대상이 된다면,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은 사회적 유용성이어야 한다. 이 유용성의 관점에서 사람들은 장단점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또 그 기준으로 정책의 세부를 검토하게 됨에 따라 의견의 차이가 일어나고 정책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지고 의견의 조정이 필요해지는 것이 공론의 정상적인 과정이다.
물론 사회적 유용성이라고 해도 그것 자체가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다른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차이가 전적으로 협의의 범위를 넘어갈 정도로 다른 것일 수 없는 것이 지금의 사정이 아닐까 한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경제적 유용성이다. 오늘날 정책 수립자들은 경제성장의 필요나 압력을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경제적 평가는 다시 사회적 유용성의 기준에 맞아들어가야 한다. 정책은 성장에 못지 않게 사회의 전반적 발전-빈부 격차의 해소, 사회적 배분과 균형의 확보에 기여한다는 점에 수렴되는 것이라야 할 것이다. 사회 문제와 경제 문제를 이어서 생각하는 관점에서 보면 더 직접적으로 실업과 고용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떤 기여가 있을 수 있느냐도 쟁점이 될 것이다. 고용의 문제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완전한 해결이 있을 수 없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한 대책은 사회 안전망의 보강이다. 지금 논란의 대상이 되어있는 신도시 개발과 토목개발의 계획이 고용 문제에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는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오늘의 경제와 사회의 위기적 성격을 긴급한 것으로 본다는 전제하에서 그러하다. 긴급하다고 해도, 다른 대체 방안이 없을 것인가가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다시 제안된 사업들이 그 자체로서 유용한 사업인가 하는 평가에 관계되어 일어나는 문제이다. 그 자체로 유용한 경우, 그것은 일석이조의 효과를 갖는 것일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경우, 그것은 추진되어서는 아니될 사업들이 될 것이다. 또 평가는 궁극적으로 경제적·사회적 유용성을 단기적으로 생각해야 하느냐 장기적으로 생각해야 하느냐 하는 데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고려 사항은, 모든 토목 공사는 국토와 환경 조건을 크게 바꾸어 놓는 일이기 때문에 국토 환경의 문제가 될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현지 주민이나 전문가가 아니고는 실감과 전문적 지식을 가지고 현안의 거대 토목 공사들을 바르게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그러한 거대 사업들을 서둘러 강행할 단계는 지나지 않았는가 하는 느낌을 가지고 있고, 토목 사업 일반에 대한 피로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사업들이 있을 수 있는 발상인 것도 틀림이 없다.
합리적으로 가장 쉽게 납득할 수 있는 것은 환경 오염의 가능성을 걱정하는 의견들이다. 환경 문제가 가장 신중하게 고려되어야 할 문제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정비 작업과 더불어 환경 대책을 철저하게 보강할 수 없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세종시의 경우 문제는 비교적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정부 기구들의 분산이 국가 기능 전체를 마비하게 하거나 비능률에 빠지게 할 가능성이 있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지방 발전에 중앙 정부기구들의 이전이 필요하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다. 계획 변경에 따라 그 동안 부풀었던 기대와 진행된 계획과 관련하여 피해 보상 조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보상이 또 다른 과대한 토목 공사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건전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무조건 경화되어 가는 정치논쟁
경부선 철도가 건설될 때, 공주 유지들의 반대로 경부선은 공주가 아니라 대전을 향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배경에 있는 생각은 풍수설이었다고 하는데, 풍수설은 전래의 환경주의 철학이다. 어떤 경우에나 참다운 발전은 내재하는 잠재력을 열어 놓는 발전이라야 한다. 중앙 권력은 밖으로부터 계획을 들이밀 것이 아니라 안에서 나오는 유기적 발전을 도와야 한다. 세종시는 약속한 것이기 때문에 신의를 지키라는 주장이 있다. 중요한 것은 선거 때의 즉흥적 약속보다는 나라의 현실과 장래를 위한 깊고 먼 고려이다. 앞으로의 득표 계산에서 불이익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선거 중의 약속을 변경한다면, 적어도 그것은 심각한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
다시 한 번 걱정스러운 것은 무조건 경화되어가는 정치 논쟁들이다. 찬반의 많은 논의에서 우리는 미래에 대한 길고 넓은 비전을 느끼지 못한다. 현안이 되어 있는 사업들에 대하여 사회적 유용성의 기준에서 따지고 드는 합리적 검토도 별로 보지 못한다. 그러한 논의와 검토가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대립과 분파작용 속에 흡수되어버리는 것이 지금의 풍토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논의에 참여하는 것을 꺼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것은 공론 공간의 투명성을 흐리는 것을 거드는 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러한 문제를 거론하는 것도, 부질없음을 알면서 경향신문으로부터 칼럼 종료의 통보를 받고, 이것이 마지막 기회이기에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는 것일 뿐이다.
2003년 12월부터 연재해온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의 칼럼 ‘시대의 흐름에 서서’를 마칩니다. 6년간 칼럼을 통해 지성적 사유와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준 김 교수께 사의를 표합니다.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김우창 | 이화여대 석좌교수>
입력 : 2009-12-02 17:56:00ㅣ수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