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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며](13) 세계시민성과 주체성(上)

by Dannie9 2010. 7. 16.
[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며](13) 세계시민성과 주체성(上)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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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세계시민이며 독립적 주체

김상봉 선생님

폭우 속에 잘 지내고 계신지요. 어느덧 이 대담이 마지막 주제에 다다랐습니다. 흰 눈과 함께 겨울의 한복판에 시작했는데 폭우와 함께 한 여름에 끝내는군요. 그 사이에 봄이 후다닥 가버렸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 봄은 더 이상 실제 계절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음속의 계절로만 남아있지요. 인간들의 과잉개발로 인해 회복불능 상태에 빠진 환경과 기후문제는 이제 봄·가을 가장 아름다운 두 계절을 앗아가고 여름과 겨울 두 계절만 남겨두는 것으로 복수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위한다는 개발이 환경을, 자연질서를, 끝내는 인간 자신을 해치고 있는 것이지요. 흙에서 나와서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유한하고 덧없는 것이 인생인데, 그리하여 가치있게 살기에는 너무도 짧은 것이 우리네 삶인데 무엇을 위해 이리도 끝없이 소비하고 개발하고 파괴하고 다투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자신이 그런 군상의 하나라서 이 문제는 누구에게 뭐라 할 계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단지 그러한 것들을 위해 살기에는 한번 주어진 인생이 너무도 아깝지 않나 싶습니다. 인간들끼리 더 많이 더 빨리 더 잘 죽일 수 있도록 더 좋은 무기를 개발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던 마크 트웨인의 독한 풍자가 떠오릅니다.

이 시대의 한국사회에 ‘기적’으로 불리는 압축적 경제성장을 기반으로 한 물품 수출 외에 세계와 나눠가질 수 있는 정신, 문화, 제도, 품격이 과연 있는가. 경이로운 경제성장에 이어 세계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던 민주화 과정의 핵심적 성취물들마저 내부의 이념공격을 통해 스스로 파괴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진은 정부의 기구축소 시도에 반발해 사퇴한 전임 위원장에 이어 새로 지명된 위원장 내정자가 자질 시비에 휘말린 국가인권위원회(왼쪽)와 신임 인권위원장 내정자의 자진사퇴를 촉구하는 시민들의 기자회견 모습.|경향신문자료사진


오늘 말씀 나눌 세계시민성과 주체성의 문제는 삶의 본질에 대한 물음과 동일하지 않나 싶습니다. 저는 둘을 하나로 이해합니다. 우린 태어나면서부터 세계시민이며 독립적 주체입니다. 따라서 세계시민성과 개별적 주체성은 한 사람에게는 동일한 것이지요. 왜냐하면 인간은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세계 내 존재로서의 개별적 독립적 자기 주체성을 갖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주체성은 생명유지를 필수전제로 하기에 생명의 종식은 곧 한 사람에게는 주체성과 세계의 동시 종언, 즉 세계와의 결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객관의 영역이지요.

“사회·개인·우주 전체가 한 생명” - 세계·사회문제, 인간의 삶과 불가분

주체성은 곧 개별성과 독립성으로부터 발원합니다. 그런데 개별성과 독립성은 또한 그 자체가 전체이면서, 전체로서의 세계의 일부이지요. 주체성과 상호성 -- 선생님 표현으로는 서로주체성이지요 -- 이 분리될 수 없는 소이이지요. 개별성과 전체성은 만나며, 사실상 하나라고 할 때의 의미는 한 생명 안에서 둘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회에서 시작하여 개인으로, 생명에서 시작하여 우주로 나아갔던 함석헌은 아예 ‘전체가 한 생명’이라고 언명하였지요. 때문에 대부분의 세계문제와 사회문제는, 경제·정치·안전·교육·보건에 걸쳐, 궁극적으로는 사람들의 삶에 관한 문제, 즉 인간문제이지요. 따라서 세계문제와 생명문제, 사회문제와 인간문제를 분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세계문제와 사회문제의 기원·전개·결과가 결국 인간문제로 귀착되는 것은 불가피하지요.

저는 이 점이 요체가 아닐까 싶습니다. 인간사회가 노정하는 문제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 다른 사회도 동일하거나 유사하게 직면하였던 문제라는 점에서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동시에, 문제에 직면한 그 개인이나 사회에는 언제나 개별적이고 직접적이라는 점에서 특수하면서도 구체적입니다. 즉 보편성·세계성과 개별성·구체성의 만남을 말합니다. 이것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그러하다고 생각됩니다. 지금 해결해야할 특수하고 구체적인 문제에 직면한 사람에게 추상적 일반론은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반대로 어떤 특수한 문제도 다른 선례들로부터의 보편적 일반적 경로나 지혜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문제인지, 왜 특수하다는 것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이른바 ‘문제인지 이전’ 상태에 머무르게 됩니다.

결국 개별성·특수성은 세계성·보편성을 상정하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는 범주이며, 개별성은 그 자체 독립적으로 전체성을 표상하면서 언제나 전체성·세계성의 일부가 아닐 수 없지요. 동시에 보편성과 세계성은 추상적으로 위로부터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개별성과 구체성에 즉하여 형성되지요. 그런 점에서 개별성과 보편성, 주체성과 세계성이 만난다는 것은, 단순히 철학적 추상적 영역으로서뿐만 아니라 구체적 현실적 범주에서도 지극히 타당한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의 한국사회가 직면한 문제는 한국문제이면서 동시에 세계문제, 즉 인간사회 일반문제의 일부이자 우리들 개인문제이기도 한 것이지요. 저는 세계시민성과 주체성의 동일범주성을 인식하기만 하더라도 우리들 개인과 우리가 만든 국가의 인식과 행태는 정말 많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외원조 미미·인권탄압·불평등 사회 - 한국은 세계시민성·보편적 기준 결여

그럴 때 주체로서의 세계시민성은 현실에서는 두 가지 통로를 통하여 발현되지 않나 싶습니다. 하나는 세계시민으로서 자기 자신의 개별적 주체성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속한 국가와 사회의 행태와 수준을 통해서이지요. 물론 궁극적으로 둘은 연결되어 있고 자주 후자로 통합되어 나타납니다. 개인윤리로서의 자선 못지않게 전체 사회윤리로서의 평등과 복지사회구현, 해외원조가 도덕적 윤리적이라는 점은 이런 함의를 갖지요. 그럴 때 저는 저를 포함해 우리들 한국민 개인의 세계시민으로서의 윤리적 하부구조 결여를 자주 느껴왔습니다. 한국사회 내부의 인간적 평등 덕목에 대한 개인윤리적 사회윤리적 파탄은 세계차원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내부 성원·인간에 대한 평등을 수용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회·인간에 대한 평등을 추구하고 지원한다는 것은 허구입니다. 내부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와 국가일수록 항상 세계시민성에서도 앞서 가지요. 개인은 말할 필요도 없고요.

앞서 상세히 말씀드린 OECD 통계에 이어 반세계적인 또 다른 통계를 볼까요. 한국 사회의 국제적 보편성의 파탄에 대한 이해는 세계시민성을 확보하기 위한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세계 시민성과 보편적 기준의 결여야말로 한국시민의식과 민주주의의 핵심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대외원조 규모를 GNI 대비 공적 개발원조(ODA) 비중을 통해 비교해보면 OECD 개발협력위원회(DAC) 평균은 0.3%이나 한국은 비교조차 불가능한 0.05%입니다.(스웨덴, 노르웨이, 네덜란드, 일본은 각각 1.02, 0.89, 0.81, 0.25%입니다.) 한국은 지금 무엇을 글로벌화하고, 국가브랜드화하고 있나요? 게다가 한국은 오랫동안 안보와 경제발전에서 국제지원을 통해 성장한 나라가 아닙니까? 즉 한국시민은 세계시민으로부터의 지원으로 오늘에 이른 사람들 아닌가요?

오늘날 한국사회는 TV, 자동차, 반도체, 조선, 컴퓨터, 휴대폰, 철강 등 첨단물품을 수출하는 주요국가가 된 지 오래입니다. ‘20세기에 인간이 만든 기적’으로까지 불린 것이 한국의 경제발전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 물산과 사람이 안 나가 있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물건을 넘어 우리가 세계에 수출할 정신, 문화, 제도, 품격은 과연 무엇이 있나요? 우리가 자유를, 인권을, 평화를, 평등을, 복지를, 교육을, 의료체계를, 노사협력모델을, 비정규직 해법을, 민주주의를…, 세계에 나누어줄 수준이 되어있나요? 정녕 무겁게 물어야할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경제의 압축성장 못지않은 이 부분들에서의 압축성장과 세계와의 나눔을 상념하지만 불가능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제게 이 두려움은 관념이 아니라 현실이며, 추상이 아니라 구체입니다.

우린 민주화 과정에서 세계로부터 평가받은 핵심적인 성취들조차 전부 뒤집고 있으니까요. 헌법재판소 설치를 통한 권력분립과 견제·균형원리의 도입, 국가인권위원회 설치를 통한 인권증진과 보호, 군부청산 및 진실화해위원회를 통한 평화적 과거극복, 시민단체의 폭발적인 족출과 참여민주주의의 확대, 자신들에게 참혹한 전쟁을 감행한 형제에 대한 관용과 포용의 손길주기…. 한국사회에 대한 해외 토론에 자주 불려 다니면서 위의 성취들이 한국사회에 대해 외국시민과 사회가 주목하는 요소들임을 깨달았습니다. 많은 해외학자들은 산업화 못지않게 빠르게 안착해가는 한국사회의 위의 성취들에 대해 공동연구나 비교연구를 제안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득세력의 불법관행에도 관대한 헌법재판 제도 정도를 빼놓고는, 해외의 상찬을 받은 다른 네 가지 글로벌 성취들은 전부 내부의 이념공격을 통해 파괴되고 있습니다. 우린 과연 무엇을 국가성취로 삼으려고 이리도 이념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한 걸음도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며 자기를 파괴하지 못해 안달인가요? 전형적인 반(反)세계시민성이지요.

개인은 세계시민으로의 자각 필수 - 전 지구적 공공성·시민성에 눈떠야

우리는 지금 세계인들의 정신과 영혼을 평안하게 해주겠다며 교회건립과 선교 헌금, 선교사 파송에서 세계선두에 서 있습니다. 소중한 헌신의지이지요. 그러나 한국사회는 현지인들의 삶을 파괴하는 기업형 유흥업소(룸살롱)의 수출에서도 단연 앞서 있습니다. 이제 공교육 파괴의 전범인 한국형 학원과 영어교육도 세계화하려 하고 있지요. 한국시민들의 이 이중성을 세계인들은 전연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우리 개인들이 사회와 국가 시민은 물론 세계시민으로의 자각적 의식을 갖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곧 세계(시민)입니다. 특별히 우리처럼 문명과 문화가 교차하는 가교국가·교량국가의 위치에 놓여있는 조건에서는 세계시민성이 더욱 필수적이지요.

함석헌이 상념하였던 우주적 공공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지구적 공공성과 세계시민성에는 눈을 떠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야 세계공화국이 불가능한 조건에서, 세계기업과 세계시장만이 압도적인 현실에 세계시민사회의 건설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적 차원에서도 국가와 기업·시장과 시민사회의 균형은 인간적 삶에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린 이미 세계에 시민사회의 폭발적 성장과 참여민주주의를 통해 이 경험의 일단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돼지화-인간화의 갈림길에 있는 지금 우리가 먼저 ‘생각하는 시민’이 돼야

저는 그 길을 ‘생각하는 시민되기’, ‘사유하는 세계시민되기’라고 여깁니다. 그리하여 금세기에 ‘보편적 한국’ 또는 ‘한국적 보편’을 성취하길 소망해봅니다. 한길사의 작은 방에서, 또 6월항쟁의 현장에서 뵈었을 때 ‘생각하는 시민’ ‘세계는 네 안에 있다’고 역설한 함석헌이 떠오르는군요. 또, 조금 다른 결이지만, 만족한 돼지보다는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되라던 밀의 언명도 덧붙이게 됩니다. “만족한 돼지보다는 불만족한 인간이 되는 편이 낫다.(인간이 된다면) 만족한 바보보다는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되는 편이 낫다.” 돼지보다는 인간이, 인간이 된다면 바보보다는 소크라테스가 되어 고뇌해야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돼지화·동물화와 인간화·소크라테스화의 갈림길에 놓여있습니다. 삶과 사회의 모든 성취와 판단기준이 물질화·속물화·동물화로 치닫는 오늘, 우리가 먼저 참 시민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와 세계의, 그리하여 자기 삶의 인간화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저희 대담 도중 갑자기 잃었던 큰 바보, 큰 시민 한 사람이 떠오릅니다. 또한 대담을 마치며 저 자신이 그동안 과연 공화국 시민으로서 살아왔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개인적 사회적으로 이제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느낌입니다. 길은 언제나 끝에서 다시 시작하고, 꿈은 언제나 서 있는 그 자리에서 미래를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의 대담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많은 생각과 배움을 가질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내내 건안하시길 빌며 이만 줄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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